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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n 20. 2016

비누 향 나는 남자

책 읽다말고 딴 생각하기

판매원은 검은 상자에 든 직사각형 비누와 보습 마스크 팩, 병에 든 세포 활성액, 튜브 형태의 얼굴 크림 두 개를 꺼냈다. 남자는 구릿빛 얼굴이었고, 손등에는 검은 털이 눈에 띄게 나 있었다. 플라밍고 핑크색 셔츠에 감청색 정장과 반짝이는 가죽 단추가 달린 낙타털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는 돈을 지불하려고 돼지가죽 장갑을 벗었다. 진홍색 지갑에서 빳빳한 지폐가 나왔다. 결혼반지는 끼고 있지 않았다. 
<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을 읽다가>



코코넛 비누를 주문했다. 코코넛 비누는 피부 트러블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단다. 나는 비누를 사용하지 않는다. 비누 대신 버블 클렌징을 쓴다. 계면활성제가 들어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비누는 남편이 쓸 것인데, 남편을 위해 비누를 주문하는 여자. 뭔가 아이보리 비누향 날 것 같은 배려다. 아, 아이보리 비누 하니까 옛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살면서 시간이 오래 지나도 잘 잊히지 않는 향에 대한 몇 가지 에피소드 중 하나.


그때가 아마 2008년이었던 것 같다. 여름이 막 시작하려는 6월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년 정도 독립생활을 하다가 급성 A형 간염에 걸려 다시 엄마와 함께 살게 된 나는 퇴근 후 저녁이면 집 근처 인라인스케이트 장에서 걷기 운동을 했다. 워낙 뛰는 걸 싫어해서 그냥 걷기나 하자고 마음을 먹고 엄마와 저녁을 먹은 뒤면 빼놓지 않았다, 한동안은. 초여름의 밤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때, 여느 날과 같이 저녁을 간단히 먹은 뒤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운동이라는 게 그렇듯 하는 사람이 계속하기 때문에 그런 장소에 가면 매일 보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중에 3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아무 무늬 없는 흰 티셔츠에 부담스럽지 않은 반바지 차림으로 가볍게 인라인스케이트 장까지 뛰어와 이어서 트랙을 계속 돌기 시작하는 남자였다. 트랙이 좁고 하나뿐이어서 조깅을 하거나 걷는 사람들이 쭉 일렬로 가는 셈인데 내가 걷고 있으면 가볍게 앞질러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간혹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 사람이 스쳐 지나갈 때면 반드시 나는 향이 있었다. 이게 무슨 향이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향인데 뭐지? 코를 벌름거리며 그의 냄새(?)를 추적하던 나는 그게 아이보리 비누향이란 걸 알게 되었다. 너무 달콤하지도 너무 청량감 있지도 않은 그 향을 나는 좋아했다. 단단하고 흔해서 어릴 때 많이 쓰던 비누였는데 그 무렵은 슈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illust by 곽명주


나는 킁킁거리며 전보다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얼굴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날만큼 강한 인상은 아니었나 보다. 그저 깨끗한 이미지였던 것은 확실하다. 저 남자도 퇴근 후 간단히 씻고 저녁을 먹은 뒤 운동하러 나오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걷고 있을 때 어느새 엄마가 내 옆으로 와,
“무슨 생각을 하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어?”라고 했다.
“어? 불렀어? 못 들었는데.”
당황한 나는 엄마를 보며 얼버무렸고 엄마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너 저 남자 보고 있었지? 왜 관심 있어?”
역시 엄마들의 촉이란. 나는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했지만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요. 엄마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알았다는 걸까? 그렇게 운동이 끝나고 다음날 어김없이 나간 인라인 스케이트 장엔 그 남자도 역시 나와서 뛰고 있었다, 아이보리 비누 향과 함께. 그때 나는 일단 그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했던 것 같다. 남자에게 비누 향이 난다는 게 이토록 플러스 요인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의 모든 점이 다 좋아 보였다. 성격도 좋을 것 같고, 물론 자상할 것 같고, 성실할 것 같고. 이렇게 운동하는 걸 보면 자기 관리도 철저할 것 같고. 키도 몸매도 저 정도면…
“또 저 남자 보고 있지?”
깜짝 놀란 나는 어느새 옆에 와있는 엄마를 보며 포기했다는 듯,
“저 남자 어떤 거 같아?”라고 물으니 엄마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엄마는
“내가 애인 있냐고 물어봐 줄까?”라고 지극히 아줌마스러운 발상과 발언을 했다. 나는 안돼!라고 말하며 엄마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초칠 순 없었다. 어쩌면 좋은 인연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신중하자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다리가 아파 조금 쉬려고 벤치에 앉았을 때 안보이던 엄마가 저 멀리서 다가오더니,
“애인 없데.”라는 게 아닌가. 으악!
“물어봤어? 왜, 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엄마는 웃겨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엄마가 일을 그르치는 것 같고 창피하고 쪽팔려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는데 그 남자, 아무 일 없단 듯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이상한 촉을 느낀 나는 엄마를 바라봤고 그제야 깔깔깔 넘어가는 엄마는
“뻥”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이런 존재다. 방심할 수가 없다. 언제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

애인이 없다는 엄마의 거짓말에 살짝 기분이 좋았던 건 사실이다. 순간적으로 용기 내볼까, 거기까지 생각이 치고 나갔던 거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엄마의 뻥이었고… 엄마는 그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한편으로 엄마가 그렇게까지 생각 없진 않구나 싶은 마음에 안심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 그 남자와 난 어떻게 됐을까?
아무 일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부터 내가 여름밤 치맥 먹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서 운동을 하지 않아 인라인 스케이트장에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 새로운 남자 친구도 생겼더랬다. (그게 지금의 남편이다) 아직도 아이보리 비누 향을 맡으면 초여름 밤 조깅하던 그 남자가 떠오른다. 향기는 이처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억에 남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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