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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n 27. 2016

밑줄을 읽으면 당신이 보여요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그런 문장들 속에서 이미지를 상상하는 일은 내겐 늘 휴식 같아서, 을 사는 행위를 포함한 독서는 유일하게 나를 집 밖으로 일으켜 세우는 활동적인 취미였다.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를 읽다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책을 자주 사는 나는 책을 ‘사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양의 스트레스를 푼다. 그렇게 책을 사들이기 시작한 게 꽤 오래됐음에도 여전히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이 설렌다. 아니 점점 더 설렌다, 세상은 넓고 책은 다양하니까. 서점에 가는 것도 좋아하고 그곳에서 직접 책을 사는 것도 좋지만 장바구니에 하나 둘 담아 뒀다가 맘 내킬 때 왕창 몰아서 주문하는 인터넷 서점의 ‘맛’도 참 달콤하다. 화면으로 표지나 미리보기로 목차나 몇몇 페이지만을 읽어 보고 책을 주문해서 집으로 배달된 실제의 책을 펼쳐보고 뒤적거려보는 그 일련의 과정을 즐긴다. 아, 이렇게 생긴 책이었구나. 이렇게 두꺼웠어? 이런 재질의 종이를 사용했군, 하며 내가 고른 책의 실물 살펴보길 좋아한다.


    요즘 출퇴근 시간이나 회사에서 짬짬이 읽는 책은 파비오 블로의 ‘아침의 첫 햇살’이란 책이다. 이탈리아 작가가 쓴 책이고 이 작가의 책은 처음 접하는데 마치 우리나라, 아니 내 얘기를 읽는 것마냥 너무 공감되고 재미있어서 아껴 읽는 중이다. 주인공인 화자가 여자인데 이 책의 작가는 심지어 남자다. 뒤로 갈수록 어떻게 여자의 이런 감정을 남자가 쓸 수 있지?라고 놀라며 침을 삼키기도 했는데, 중간중간 상당히 야한 장면도 많이 나와 지하철에서 누가 내 책을 들여다보는 사람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귀가 빨개지면서 책을 오므리게 됐다.


    재작년 여름 가족들과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부산이 처음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새로움을 느끼게 되는 곳임엔 분명하다. 그때 처음으로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았다. 책을 워낙 좋아하는 나는 이런 곳을 찾는다는 것만으로도 그 여행을 백 프로 만족하게 된다. 작은 헌책방들이 오밀조밀 몰려 있는 그곳은 거리 전체가 이미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내가 나중에 하고 싶은 책방 컨셉을 찾기도 했다. 아무것도 사지 않으면 서운할 것 같아 헌책방 한 곳에 들어가 책을 고르기 시작한 나는 애정 하는 김애란 작가의 책 중 유일하게 읽어보지 않은 '침이 고인다'를 발견, 냉큼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침이 고인다’를 펼쳤는데, 군데군데 무수히 많은 밑줄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illust by 곽명주


검은색 펜으로 힘 있고 과감하게 밑줄 그은 문장들을 읽으며 이 사람이 여기에서 뭐를 느꼈던 걸까, 이 문장엔 왜 그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진 몰라도 나처럼 자신만이 공감할 수 있는 문장에 밑줄 그었음은 분명했다. 가슴을 울리는 명 문장이 아닌 사사로운 감정들에 그어진 밑줄 들이었으니까. 그 밑줄로 짐작하건대 이 헌책의 주인은 아마도 남자일 것 같았고 나이는 어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밑줄이 일정하기보다 빨리 긋는 것에 초점이 맞춰있는 것으로 보아 성격은 급할 것 같았다. 그 과감한 밑줄을 본 뒤로 나는 책에 좀 더 많은 밑줄을 긋게 되었다. 사실 그 전에는 밑줄보단 (소심하게) 귀퉁이를 접어 놓는 것이 내 스타일이었으나 그날부터 그 책의 원래 주인처럼 시원스럽게 밑줄 긋는 스타일에 푹 빠지게 된 것이다.

재미있게 읽은 책을 누군가에게 빌려주는 일은 꽤나 보람된다. 하지만 밑줄이 많이 그어진 책을 보는 게 괜히 거슬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미리 얘기해주는 걸 잊지 않는다.


‘밑줄이 많아서 좀 신경 쓰일지 몰라요.’


    밑줄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이 사람이 어떤 감정에 어떤 상황에 몰입했는지가 읽힌다. 그래서 헌책이 새 책 보다 더 재미있다. 헌책은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이야기 외에 헌책이라는 낡음이 주는 누군가의 스토리가 있다. 직접 듣지 못하더라도 상상한다. 그래서일까 새 책 보다 누군가의 손에 걸쳐 나에게 도착한 헌책에 더 맘이 가는 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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