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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l 04. 2016

투정으로 시작해 반성으로 끝나는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취향이라는 이름의 정제된 일상, 흡연처럼 고치지 못한 악습들, 다이어트를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삼십대 도시인의 정체성까지. 그날 밤 그는 일기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에겐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답이 있다. 육하원칙에 의한 선명한 일상. 
<백영옥의 ‘아주 보통의 연애’를 읽다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건 아니어서 대략 스물다섯 권 남짓의 일기장이 집에 있다. 중간에 잃어버린 것도 있고 일기를 쓰지 않은 해도 있었을 것이다.(아마도 미니홈피나 블로그가 한창 유행이었을 때) 일기 쓰기의 매력을 일찍 알아버린 나는 책상에 작은 스탠드 하나 켜 놓고 일기 쓰는 시간을 스스로 꽤 낭만적이라 생각하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으로 단정지은 지 오래다. 과거엔 책상에서 썼지만 요즘은 설거지를 마친 뒤 식탁에서 쓰거나 저절로 눈이 감기기 전 침대 머리맡에서 쓴다. 어릴 때는 학교에 관한, 짝사랑하는 선생님, 좋아하는 남학생, 뭐 그런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학창 시절 몇 명의 단짝들. 그들과 보냈던 애틋한 시간은 물론 홀로 남겨져야 했던 시간, 그리고 다시 회복된 관계 등 할 얘기는 무궁무진했다. 일기는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정점에 달한다.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이성을 사귀게 되면서 스스로 할 얘기가 많았던가 보다. 나중에 이걸 읽을 때 어떤 기분이 들 것이란 걸 예감한 것 마냥 자세하고 빽빽하게 적은 페이지들을 보며 새삼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꼭 누가 볼 거라 예상을 하고 썼던 것 같다. 그래서 일기에도 겉멋이 잔뜩 들었다. 들춰보기 싫어질 만큼 먼지가 더께로 쌓인 일기장들은 지금 서재 방구석 상자 어딘가에서 나처럼 묵직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하루에 2개의 일기를 쓰고 있다. 하나는 육아일기고 하나는 원래 쓰던 ‘나의 일기’다. 아이를 낳고는 확실히 일기 쓸 수 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었다. 한 권의 일기장을 2년 넘게 쓰고 있으니 말이다. 육아일기는 아이가 크는 속도를 직접 경험한 뒤 이 시간들을 그냥 보내선 안 되겠단 생각에 쓰기 시작했다. 육아일기는 단 한 줄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남겨야겠단 생각으로 아이 이름을 붙여 ‘OO의 오늘’이란 타이틀을 붙여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쓰고 있다. 아이는 콩나물시루에 담긴 콩나물처럼 쭉쭉 크고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언제 이렇게 큰 거지? 생각들만큼 어제보다 오늘 더 자란 아이를 보며 새삼스레 놀라곤 한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뭔가를 찾아 거의 메모 수준의 일기를 쓰는 게 나의 육아일기다. 순전히 아이가 많이 컸을 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아이는 자신이 엉금엉금 기고 아장아장 걸을 때를 모를 테니 사진보다 글로 읽으면 또 다른 추억이 될 것이다. 사실 매일 쓴다는 게 쉽지 않지만 딱히 어렵지도 않다. 뭐라도 쓰면 되니까. 하다못해 ‘오늘은 바나나 혼자 쥐고 한 개를 다 먹었다.’와 같은 내용도 좋고, ‘처음 ‘엄마’라는 단어를 정확히 발음한 날’이란 한 줄도 특별하기만 하다.

illust by 곽명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래 내가 쓰던 나의 일기다. 일기는 주로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너무 슬프거나 억울할 때 더 간절해진다. 그럴 때일수록 빨리 쓰고 싶어 진다. 부모 형제, 남편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 일기에 쏟아 놓는 것이다.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투덜거림으로 시작된 일기는 대부분 반성으로 끝난다. 이건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래서 일기는 쓰면 좋다는 거다. 알 수 없는 내 안의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나도 모르게 회복된다. 한결 정돈된 마음으로 잠들 수 있다. 그건 다른 누군가의 도움도 아닌 나 스스로가 해결하는 거다. 순전히 글로 말이다. 아이가 글을 쓸 수 있을 때가 되면 반드시 일기 쓰기는 ‘강요’할 것이다. 방법이야 어떻든(그때 되면 일기장(노트)이라는 개념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하루를 적는 습관은 반드시 가르치고 싶다. 물론 나 또한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어도 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친정 엄마 생신 선물로 일기장을 선물해 드렸다. 일기 쓰기가 치매에 탁월하단 기사를 읽기도 했고 젊었을 때 엄마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봤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엄마가 다시 일기를 썼으면 좋겠어’라고 메모해 건넸더니 엄마도 ‘그럼 써 볼까?’라며 좋아하셨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일기는 그런 오늘을 기록해 놓는 일이니 계속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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