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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l 12. 2016

다른 이의 손톱까지 신경 쓰는 삶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저 두 사람은 정말 조용한 커플이지.”
“네가 너무 말이 많은 거야! 신인 개그맨처럼 시시껄렁한 얘기를 재잘재잘.”
“그렇지만, 침묵이 이어지면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난 네가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런 느낌이 드는데.”
“……”
대개 지사토와의 말다툼은, 손톱깎이를 찾고 있었는데 면봉이 나와서 그대로 귀를 후비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으로 끝난다.

<요시다 슈이치의 ‘열대어’를 읽다가>




    막 문이 닫히는 지하철 1호선에 간신히 올라탔다. 휴… 지각은 안 하겠구나, 생각하고 숄더백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지난 금요일 마지막으로 읽은 페이지를 펼친다. 주말이 지나고 난 뒤 가장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책을 거의 한 줄도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읽으려면 충분히 읽을 수도 있었을 시간이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은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읽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책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책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기도 하거니와 더 재미있는 걸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낮잠에 들면 그래도 좀 읽자,라고 생각한 뒤 식탁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친 다음, 휴대폰을 든다. 이때 켜는 휴대폰이 문제다. 책은 일단 잠시 미뤄두고 인스타그램이나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을 차례로 순회한 뒤 네이버에 들어가 쇼핑 카테고리에 진입. 괜찮은 원피스 있나, 편한 바지 있나, 시원한 블라우스 있나,를 괜히 한번 둘러본다. 그렇게 보다 보면 내가 자주 가는 쇼핑몰의 근황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내가 못 본 사이에 얼마나 더 예쁜 게 많이 업데이트됐으려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너 개의 쇼핑몰을 돌다 보면 저 멀리서 엄마, 하며 잠에서 깬 아이가 나를 부른다. 읽을 차례를 펼쳐 놓은 채 뒤집어 놓은 책을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채 다시 덮어놓는다. 그렇게 아이를 챙기기 위해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는 게 나의 휴일 패턴이라면 패턴이다.


    그렇게 읽지 못한 책은 월요일이 시작되는 출근길 지하철을 타자마자 재빠르게 펼친다. 사실 집보다 지하철에서 책이 훨씬 잘 읽힌다. 집중도 잘된다. 카페 같은 공간에서 독서나 시험공부가 잘 되는 이유를 연구한 결과 집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우리는 타인의 집중을 의식한다는 거다. 근데 그게 또 맞는 것 같다. 나는 저들과 함께 집중하고 있다, 무진장 독서에 깊게 빠져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어필하고 싶은 것이다. 얼마 전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구입한 가야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있다.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줄 알았던 그 책. 하지만 읽지 않은 그 책을 작고 가벼운 문고본으로 구입했다. 이 책은 첫 문장이 예술이다.


“현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설국이었다.”


밤의 끝자락은 이미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의 단문으로 이어지는 첫 문장. 대단히 기발해서 놀랄만한 문장도 아닌데 그저 저 문장만 읽어도 이 책 절반은 다 읽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 책을 다시 펼쳐 읽으며 또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책을 들고 있던 내 손을 살펴보다가 깔끔하게 바짝 깎은 내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이 짧으면 자판을 두드릴 때 명료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일주일마다 손톱을 짧게 깎곤 한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손톱은 깎았는데 아이 손톱을 깎아 주지 않았다. 아니 손톱을 깎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오늘 아침 등원하기 전에 생각이 났고 잠이 깬 아이에게 “잠깐만~ 잠깐만~”달래며 손톱깎이를 들이대 봤자 아이가 내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결국 나는 아이의 손톱 깎는걸 포기하고 그냥 좀 지저분한 채로 어린이집에 보냈다. 가끔은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손톱을 깎아준다. 내가 깎은 적 없는데 깨끗해진 아이의 손을 보면 죄송하면서 한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illust by 곽명주


    결혼이고 육아고 이런 것 같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톱까지 신경 써야 하는 삶. 때로는 아이뿐만 아니라 남편의 손톱과 발톱 상태까지 내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다니. 여직원들 많은 회사인데 지저분하게 자란 손톱으로 출근하면 사람들이 괜히 (아내인) 나를 욕할 것 같은 이상한 심리에 남편을 다그쳐 기어코 12시 넘은 야밤에 손톱을 깎게 만들기도 한다. 요즘은 정말 나만 신경 쓰면 끝이던 싱글 라이프와는 360도 다른 삶이다. 비단 손톱 발톱뿐이겠는가. 이건 세발의 피에 불과하다. 전에는 이렇게 급변한 나의 삶이 너무 피곤하고 지긋지긋했다. 벗어나고만 싶었다.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써야 하다니. 숨 막힐 지경이었다. 내가 왜 결혼은 해가지고 이 고생을 하나. 그러다가 친정엄마를 생각하게 됐다. 엄마는 아직도 우리 집 냉장고를 신경 쓴다. 그 정도 되면 신경 쓰는 게 피곤하다기보다 그냥 우리 집 냉장고가 엄마 냉장고 보듯 훤해지는 단계가 됐다는 게 맞을 것이다. 본인 냉장고는 블랙홀 중에 블랙홀이지만 우리 집과 언니네 냉장고에 썩어나가는 게 있는지 없는지 철저히 관리 감독한다. 나도 언젠가 장성한 아들에게 ‘너 손톱은 깎고 다니니?’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반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너무 잘 굴러가는 그들의 삶이 조금 서운해지는 날도 오겠지. ‘내가 알아서 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핑, 돌지도 모르겠다. 챙길 수 있을 때, 보살필 수 있을 때 가능하면 내가 우선인 상태에서 감싸며 살아야겠다. 벌써부터 품 안의 자식 걱정하는 내가 좀 우습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내 삶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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