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인생

오후 4시에 쓰는 글

by 이유미

현금이 부족했다. 아니 그건 부족했다기보다 없는 게 맞겠다. 월급이 들어오면 1순위는 카드 값을 갚는 거였고 그다음은 대출이자를 내고 그다음이 보험, 그다음이 각종 세금 및 관리비를 내는 순이었다. 그러면 가끔은 관리비 같은 세금은 다음 달로 이월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현금은 더 이상 현금이 아니다. 월급과 카드값이 거의 동일하다. 카드값을 내고 나면 허무해지는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젠 그러려니 할 만큼 무감각해졌다.


그런 인생을 카드인생이라고 한다. 3일 전 현금이 없어서 친정 엄마한테 50만 원을 꿨다. 종신보험을 매달 자동이체가 아닌 입금으로 해결하고 있는데, 지난달 입금한 줄 알았던 보험료를 내지 않았던 모양이다. 분명 가계부에는 적혀 있어 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낸 게 아니라 내고 싶은 희망사항이었던 걸까? 보험회사에서 계약이 해지될 거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고 부랴부랴 담당자에게 확인해보니 한 달을 건너뛰었단 거다. 당장 보험료 29만 원이 없어서 친정 엄마한테 돈 좀 꿔달라고 말하니 엄마는 계좌번호를 보내라고 했다. 사실 엄마도 막 부유한 편은 아니지만 다행히 노후에 돈 걱정하고 살지 않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용돈 쓰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고 다만 얼마씩 저금까지 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엄마라도 통장 잔액까지 공유하진 않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예상하는 정도. 작년에 보석 산 게 700만 원어치라면서 이제 더는 갖고 싶은 것도 없으니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이럴 때 남이나 형제가 아닌 부모에게 돈 얘기를 꺼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잠시, 계좌번호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엄마 이름으로 50만 원이 입금되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보험료 두 달치를 내고 났더니 다시 마이너스였다. 걱정 하나를 해결하니 또 하나가 원투쓰리로 달겨 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500만 원 마이너스 통장 만기일이 다가오는데 연장 조건이 10% 변액이었다. 어쩔 수 없이 또 50만 원을 더 융통해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12시,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랜만에 맥도널드로 점심을 때우기로 한 건 그냥 우연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점심 값도 아껴야 한다는 사람들의 바람이 묻어있던 의견 제시이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점심을 먹는 동료들은 다들 흔쾌히, 마치 별식을 먹는다는 기분으로 맥도널드로 향했고 빅맥, 상하이 버거, 통새우 버거 등 각자 구미에 당기는 메뉴를 정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오늘 카드 결제일인데 큰일 났다.” 김 과장이 말했다.
“왜요?” 내가 물었다.
“120 빵꾸 났어. 꿔야 되는데 어디서 꾸지… 아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김 과장이 말했다.
타인의 걱정이 위안이 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는 김 과장의 돈 걱정에 괜히 마음이 가벼워졌다.
“저는 어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어요.” 듣고 있던 차 과장이 말했다.
순식간에 혼자만 돈 없다고 끙끙대다가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왜요?” 또 내가 물었다.
“우리 월급날이랑 카드 결제일이 안 맞아서 자꾸 돈이 모자란 거예요. 그래서 그냥 이 참에 한번 만들었지.”
“아, 돈 어디서 꾸지…” 김 과장이 또 말했다.
“현금이 없어도 너무 없어요. 맨날 카드로 살아. 이게 뭔지 모르겠어.” 빅맥을 시킨 박 대리가 말했다.
“다 그렇죠 뭐. 카드로 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차 과장이 말했다.
이윽고 우리가 주문한 버거 세트 4개가 나왔다. 쟁반에 가득 담긴 버거와 감자튀김을 보니 갑자기 식욕이 돋았다. 우리는 각자 제 몫의 감자튀김과 콜라를 자신 앞에 놓고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냈다. 돈이 없는데 햄버거는 무척 맛있었다. 모두 비슷한 처지의 직장인들이 모여 햄버거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고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다들 멀쩡해 보여도 속 빈 강정마냥 현금이 없다. 입장과 처지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현금이 없고 매달 카드로 사는 건 비슷했다.

점심을 먹고 한차례 졸음이 휩쓸고 지나갔을 때쯤 부산에 사시는 시누에게 문자가 왔다.
-올케 이런 얘기 꺼내서 정말 미안한데, 나 백만 원만 꿔줄 수 있을까?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시누는 아주 가끔 남편 몰래 나에게 돈 얘길 꺼냈다. 떼먹고 그런 사람은 아니어서 여유가 있을 때는 돈을 융통해 주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나도 꿔줄 수 있을 정도의 현금이 없었다. 나는 주저할 새 없이 답장을 썼다.
-형님, 죄송해요. 저도 이달에 현금이 없어 친정엄마한테 50만 원을 꿨네요. 죄송해서 어쩌죠?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다른 데 알아볼게. 늘 고마워.
-고맙긴요. 죄송해요… 힘내세요.
막판에 힘내세요, 란 말은 쓸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다들 돈이 없을 수 있을까? 나도 없고 직장동료도 없고 시누도 없다.
현금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가짜 인생을 사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카드를 쓴다. 우리는 매 순간순간 빚을 지고 사는 거나 다름없었다.

매번 카드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뭘 이렇게 많이 쓴 거지? 왜 매달 줄인다고 줄였는데 카드 값은 늘 이 모양일까. 뭔가 오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고지서를 꼼꼼히 체크하지만 하나 같이 몇 천 원에서 1, 2만 원 쓴 게 몇 백만 원으로 불어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차를 몰지 않을 수도 없고 끼니를 줄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내가 값비싼 가방이나 옷을 사고 이런 고지서를 받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단 생각이 든다. 당장 내일모레가 마이너스 통장 만기일이다. 당장 돈 50을 어디서 꿔야 할지 대책이 서질 않았다. 오후 4시, 걱정이 태산인데 또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매일매일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넘기는 것도 지쳐간다. 나는 왜 체계적으로 살지 못하는 걸까. 왜 매번 닥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걸까. 내 평생 여유자금이라는 건 없는 걸까. 노후대책이 다 뭐람. 당장 내일이 마이너스 통장 만기일인데. 점심시간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던 돈 얘기가 떠올랐다. 120만 원이 모자라다던 김 과장은 돈을 구했을까.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던 차 과장은 얼마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만든 걸까. 불현듯 괜히 돈 얘길 한 게 아닐까 싶은 우려까지. 이달에 어떻게든 매꾼다면 다음 달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카드 값은 줄어들긴 할까.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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