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

오후 4시에 쓰는 글

by 이유미

콩국수가 생각나는 저녁. 나는 마땅히 먹을 것도 없고 해서 국수를 삶아 콩국물을 부어 콩국수를 해먹기로 했다. 마트에는 이맘때쯤이면 곱고 고소하게 간 콩국물을 팔았는데 1.5리터 페트병 하나에 2, 3천원이었다. 여름이면 냉면보다 즐겨먹는 게 콩국수라 콩국물을 사다 놓는 건 빼먹지 않았다. 마트에 가려고 지갑을 들고 슬리퍼를 신는데, 왜 그랬을까. 불현듯 네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너도 콩국수를 참 좋아했지. 내가 만든 콩국수를 참 맛있게도 먹었는데. 더운 여름 비좁은 원룸에 여자 둘이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콩달콩 재미있게 지냈던 것 같은데.
연락 끊긴지 벌써 3년쯤 된 것 같다. 우리가 서로 연락하기 껄끄러운 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주 가끔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각나곤 한다. 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보다 내 쪽에서의 연락이 껄끄러운 건 사실이지.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린 여전히 함께 살고 있을까? 내 기억에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나는 너와 사는데 그리 난관이랄 게 없어서 그럭저럭 살만 했다. 너랑 나랑은 취향도 취미도 얼추 비슷해서 마치 친 자매처럼 아니 자매보다 더 함께 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책을 좋아했고 너는 책보다 만화책을 좋아했지만 집중해서 뭔가를 본다는 것이 잘 맞았고 둘 중 하나가 혼자 있는 것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 무난히 2년을 보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친구끼리, 더군다나 너랑 나처럼 함께 사는 친구가 취향이 비슷하다는 건 다소 위험한 일이었던 것 같다. 어떤 면에서? 그야 남자 문제겠지. 너랑 내가 이렇게 된 것 자체가 다 남자 때문이니까.

6월의 오후 6시는 제법 후텁지근하다. 지갑 하나 달랑 들고 슬리퍼 찍찍 끌며 마트에 가는 내 모습이 어딘가 자유롭다. 조금 외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나쁘지 않다. 어쩌면 외로운 걸 좀 즐긴다고 해야 할까? 그때 이후 사람에 대해, 아니 친구와 애인에 대해 믿지 못하게 된 건 사실이다. 아무렇지 않다면 이상하겠지. 3년 사귄 애인이 내 친구와 뒹구는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여자는 이 세상에 없다. 떠올리기 싫은데 또 생각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의아한 건 내가 그날 그 둘의 모습을 보고 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다시 나왔을까. 사람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으면 원래 그런건가. 이상하게 아무것도,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두 사람은 내가 현관에 서서 약 30초 동안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격정적으로 서로를 안았다. 나는 그게 조금 무서웠던 것 같다. 평소 내가 알고 있던 친구와 그가 아니었던 것 같았으니까. 나는 소리 나지 않게,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조용히 문을 닫고 밖에서 기다렸다. 그 이상 벗어나긴 힘들 것 같았다. 사실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들오들 떠는 것 밖엔. 멈추고 싶었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쪽팔리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일을 다 치르고 마주 앉아 차라도 마실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은 없었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나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모두가 끝이구나, 끝났어, 라는 생각.

비밀번호를 알지만 초인종을 누른 건 두 사람에게 시간을 준 거였다. 어차피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그 좁은 원룸에 숨을 곳은 없으니까. 어디 하나 개별 공간이 없는 곳이었으니까. 더 황당한 건 체념한 듯 문을 연 사람은 친구가 아닌 그였다는 사실. 그건 그 사람의 판단이라고 했다.


“내가 나갈게.” 라고 말했다지.


그는 친구를 걱정한 걸까. 나를 걱정한 걸까.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은 건 두 사람에게 술 냄새가 나느냐였는데, 둘은 술도 마시지 않고 그런 짓을 벌였다.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그즈음 그와 나 사이엔 한동안 관계가 없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남자는 어딘가에서 그걸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던데 이 남자 왜 나에게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했던 게 사실인데. 그런 이유가 있는 줄도 모르고. 친구가 있었다. 친구와 애인을 공유했다.

난 누굴 탓하기 보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저 쪽 팔렸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일이 나에게 벌어지다니. 근데 하필 이런 일이. 정말 창피하다, 창피하다… 그때 생각을 하면 식욕이 떨어지곤 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나 보다.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 오히려 빨리 콩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이젠 그 일이 제법 남일 같아졌나 보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친구와 내가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을 때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애인을 잃은 것보다 친구를 잃은 게 속상할 거라 사람들은 추측하지만, 글쎄 솔직한 내 심정은 나는 아무도 안타깝지 않았다. 그녀와 남이 된 것도 애인과 헤어지게 된 것도. 아, 그건 있다. 시간이 아까웠다. 친구와 그를 만나느라 보냈던 내 시간이. 다른 친구를 사귀었다면, 다른 남자를 알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만으로 머리가 공허해졌다.


다행히 마트엔 이미 콩국물을 팔고 있었다. 마트까지 걸어가면서 혹여 너무 일찍 찾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렇다면 그저 냉면이나 만들어 먹고 말지, 라고 생각했는데, 있었다. 그날, 친구와 그를 본 그날도 내 손에는 콩국물이 든 비닐 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친구가 좋아하는 콩국수를 끓여 줄 참이었다. 며칠 입맛이 없다고 했던 게 기억났기 때문에. 토마토도 샀다. 얼려놓은 얼음을 국물에 넣고 시원하게 먹으며 밀린 드라마를 몰아 볼 생각이었다. 나는 평생토록 콩국수를 먹을 때마다 섬광처럼 그때의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처음에는 원망스러웠지만 뭐랄까 이젠 헤프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때로는 나에게 벌어진 일이 아니라 나도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같달까. 차라리 그런 거였음 좋겠다.

어떤 일은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티눈처럼 계속 신경 쓰이겠지. 짜내지 않으면 계속 계속. 짜내는 건 너무 아프지만 꼭 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때 그 티눈을 짜내지 못했다. 그런 것도 다 타이밍이 있는 건데. 짜내지 못한 티눈은 그대로 딱딱해져서 나를 너무 성가시게 했다. 물이 끓는다. 면을 넣어야지. 냉장고에 넣어둔 콩국물은 얼마나 고소할까. 토마토를 산다는 게 깜박했다. 집에 있는 수박을 썰어 고명으로 올려야겠다. 콩국수가 생각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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