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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un 30. 2016

팟캐스트로 듣고 반한 책

'갑을고시원 체류기'와 '알바생 자르기'

나는 아이를 6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다.
육아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아이를 재워놓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스마트폰으로 '6개월 아이 어린이집'을 검색했다.


보내도 상관없다, 일찍 보낼수록 잘 적응한다, 와 말도 안 된다 6개월은 너무 빠르다,

아이는 3년은 데리고 있어야 한다 등 엇갈리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중 어떤 글을 보고 그만 참아왔던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는데,
6개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니 앉지도 못하는 아이가
누워서 걷고 뛰어노는 아이들 발만 보고 있는 걸 상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글이었다.

나는 끝내 그 모습에 우리 아이를 오버랩시켜
상상하고 말았고 아이가 깰세라 터지는 울음을 꾹꾹 눌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결국 6개월짜리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 갔다. 그렇게 지낸 지 벌써 9개월이 다 돼간다.
이제는 걷는걸 넘어서 제법 뛰려고 하는 아이를 매일 어린이집에 보내고 데려온다.


출근할 때는 남편이 아이를 데려다주고

퇴근이 비교적 정확하고 빠른 내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아이를 데려올 때마다 차에서 나는 라디오도 음악도
듣지 않고 무조건 팟캐스트를 듣는다.

내 팟캐스트의 목록 대부분은 책과 관련된 방송인데,

아주 가끔 육아가 끼어있을 뿐이다.

사실 최근엔 그마저도 용량 부족으로 삭제했다.

어린이집에서 집까지 약 20분 정도 소요되는데
그동안 차에서 듣는 책 팟캐스트가 세상 달콤하다.


다행스럽게도 노느라 피곤한 아이는 그 사이 잠들 때가 많았고

나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기며 책 이야기를 듣는다.

운전도 꽤나 천천히, 느긋하게 한다. (집에 가면 폭풍 집안 일이 시작되므로)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와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는

내가 즐겨 듣는 '라디오 단편소설'이란 방송에서 '듣게' 된 소설이다.
현재 연극배우로 활동 중인 진짜 배우들이 리얼하게 책을 읽어주는데
개인적으론 웬만한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재미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책마다 다르지만 단편소설이다 보니 약 25분 정도씩 3~5회에 걸쳐 방송된다.
이렇게 방송으로 듣게 된 두 권의 책을 나는 실제로 구입해서 다시 읽기도 했다.
그만큼 재밌었다.

실제로 방송을 두 번씩 들었기 때문에 눈으로 그 대사를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냥 첨부터 읽는 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재미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배우들이니 얼마나 감정을 잘 살려서 읽었겠는가.

지금은 더 이상 업데이트되고 있지 않아 못내 서운하지만
그즈음엔 올라와 있는 책들을 골라 듣는 즐거움에 집으로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카스테라'라는 단편집에 있는 소설이고,
'알바생 자르기'는 아주 얇은 한 권 짜리 단편집이다.
한창 IMF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되는 일이 붐처럼 일었던 시절
가세가 기운 탓에 고시원에 들어가게 된 한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낱낱이 드러낸 소설이 갑을고시원 체류기다.

특이 박민규 작가 특유의 라임을 살리는 듯한 문장이 매력적인데

예를 들어 이런 부분,


바로 다음날 나는 친구의 집을 나왔다. 컴퓨터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간편한 짐이었으므로, 그것은 <이사>라기보다는 <이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이동>마저도 친구가 차로 도와주었으므로 마치 가벼운<운동>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나는 이사에 임했다. 힘들면 언제든 다시 찾아오렴.

인사를 올리는 나에게, 친구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p277>


친구 집에서 얹혀살던 주인공이 어딘가 모를 서러움에

친구 집에서 나오기로 결정한 뒤 갑을고시원으로 이사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왠지 생각에 잠겨보지도 않은 채 덜컥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듣는 사람에 따라, 또 새겨듣기에 따라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이 복받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럽지 않고, 대신 외로웠다.

<p281>


창문이 없어 당연히 빛이 들어올 리 없고 의자를 책상 위로 올리지 않으면

잘 수 없는 공간에서 지내야 하는 주인공의 고시원 분투기를 읽고 있노라면

20대 초반, 그때 우리 집도 적잖은 IMF 타격을 받았는데, 당장 이사할 곳이 없어

아는 언니네 집에 얹혀살아야 했던 2주가 기억나기도 했다.

눈에 가시처럼 느껴지는 알바생을 자르기 위해 엄청난 심리전을 치르는 한 직장인의
이야기인 '알바생 자르기'는 내가 직장을 다녀서 그런가, 실제로 이런 애 있을 것
같고, 바로 우리 회사 이야기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솔직한 표현에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가 작가가 되기 전 직장 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그 현실감이 더 농도 짙었던 것 같다.


-그 아가씨는 하는 일이 정확히 뭐야? 박 차장이 뽑은 거야?
박 차장은 지금 그만둔 은영의 상사였다.
 -박 차장님이 출산휴가 들어갈 때 빈자리를 메우려고 뽑은 아가씨예요.

우리 회사 오기 전에는 무슨 중학교에서 서무를 했다던데요.
 -어째 교직원 같은 분위기더라. 맨날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박 차장은 지금 그만둔 거지? 육아휴직 상태가 아닌 거지?
사장이 서울에 올라온 지는 이제 겨우 한 달이었다.
그전까지는 포항과 울산을 오가며 영업을 담당했다.
외국인 사장이 독일 본사로 돌아가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장이 된 케이스다.

막 자기 업무 파악이 끝났고, 다른 사람들의 업무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다.

이 순간까지 사무보조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두셨어요. 사장님이 서울 올라오기 며칠 전에.
박 차장이 육아휴직을 마치자마자 사표를 쓴 데 대해서는 은영도

괘씸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남자들 앞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박 차장이 하던 일을 지금 그 아가씨가 하는 거야?

그 아가씨가 그런 걸 할 능력이 되나? 박 차장은 원래 하던 일이 정확히 뭐였지?
 -원래 박 차장님이 하던 일은 총무였어요.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 다요.

회계랑 세무처리도 하셨고.
 -그런데? 지금은 그걸 그 아가씨가 해?
 -혜미 씨가 하는 일은 원래 박 차장님이 하던 일의 3분의 1쯤 될 거예요.

독일에서 브로슈어 오는 것들 정리하고, 울산이나 포항으로 부품 보내고,

청소 아주머니들한테 청소할 곳 알려 주고, 그런 것들이요. 우리 교육 교재들 제본하고,

음료수랑 커피 캡슐 같은 것도 채워놓고요.
 -그러면 나머지 3분의 2는 누가 하지?
테이블 반대쪽에서 누가 재미있는 농담을 했는지 폭소가 터졌다.

은영은 괜히 사장 옆자리에 앉았다며 후회했다.
 -3분의 1은 제가 합니다. 독일에서 이런저런 문의가 오면 제가 답장하고,

회계나 세금 관련 일도 제가 넘겨 받았어요..
<p14>


나는 요즘도 책 관련 팟캐스트를 꾸준히 듣고 있다.

어제는 얼마전 '종의 기원'을 출간한 정유정 작가가 나온

'낭만서점'을 들으며 퇴근했다.
운전할 때뿐만 아니라 설거지할 때나 빨래를 널고 갤 때,
콩나물 시루마냥 책도 못 펼칠 정도로 사람 꽉 찬 지하철에서 여전히 책을 듣는다.
숨어 있는 주옥같은 장, 단편 소설들이 많이 업데이트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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