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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Aug 01. 2016

옷장 가득, 입을 게 없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여름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다. 보자마자 모두 흥분해서 산 것인데 이상했다. 유행은 왜 금방 낡아버리는지.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쭈글쭈글 함부로 쌓인 옷더미가 내 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처럼 느껴져 울적했다. 지난해 내가 우쭐한 기분으로 걸치고 다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김애란의 ‘비행운’을 읽다가>




신혼 때 아기자기한 맛에 구입한 장롱은 결혼 생활 5년이 지나자 활용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일반 장롱보다 키가 작은 반면 북유럽풍으로 나름 당시에는(물론 지금도) 핫한 신혼 아이템임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이 장롱 세트 세 짝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근심 걱정 하루하루 늘어나듯 옷도 늘어나고 이불도 늘어났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불 넣을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 부부는 고심 끝에 붙박이장을 설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서 기존에 있던 장롱을 중고나라에 사진을 찍어 올렸다. 몇 시간 되지 않아 임자가 나타났고 우린 완전 헐값에 장롱을 팔아 버렸다. 나름 깔끔하게 사용해서 어디 망가진 구석도 없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끄러 안고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금요일 밤, 요즘 무한도전보다 재미있는 쇼미더머니를 틀어 놓고 장롱에 든 모든 옷을 안방 침대 위에 쏟아부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옷들이었다. 금세 침대는 발 디딜 틈 없이 옷들로 점령당했다. 우리가 설치하기로 한 붙박이장은 빨라야 화요일 도착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심란하게 3일을 버텨야 했다.


그렇게 화요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붙박이장 설치 기사 두 명이 초인종을 눌렀다. 약 2시간 남짓 모든 설치가 마무리되고 옷 정리할 일만 남겨두었다. 침대 위에 쏟아 놓은 점퍼며 코트 등을 보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다 보면 바닥이 드러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가장 위에 있는 옷부터 하나 둘 붙박이장 옷걸이에 걸기 시작했다. 하필 옷방과 안방이 넓지도 않은 집 끝과 끝이어서 백 번 이상은 왔다 갔다 한 것 같다. 장롱이 있던 공간에 들어간 붙박이장이다 보니 실질적으로 크기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다. 다만 이불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는 정도. 그것만으로도 사실 굉장히 뿌듯하긴 했지만. 무게가 상당히 나가는 겨울 외투를 다 걸자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불안하기 시작했다. 아직 걸어야 할 옷들이 많은데 공간이 왜 이리 부족한 걸까. 그때부터 나는 옷을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지난 1년 동안 단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은 모조리 분리해냈다. 그걸 다 버릴 순 없고(미련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 안에서도 진짜 진짜 입을 것 같지 않은 옷들을 다시 골라냈다. 그 대부분은 언니가 넘겨준 옷이었는데, 옷 욕심이 많아 일단 받아서 집에 왔지만 막상 입은 적은 몇 번 없었다.


illust by 곽명주


유행이 살짝 지난 듯한 검은색 재킷부터 푸른색 꽃무늬 패턴이 들어간 블라우스, 다소 형이상학적 패턴이 들어가 맘에 들어했지만 실제로 입은 건 총 세 번이 될까 말까 한 롱치마, 자주 입긴 하지만 너무 입어서 구멍이 난 티셔츠까지 몽땅 모아보니 이것도 작은 언덕만큼 쌓였다. 그래도 옷장은 턱 없이 부족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더 큰 장롱을 샀고 옷을 이만큼이나 뺐는데도 옷 넣을 공간이 부족한 걸까. 어쨌거나 다시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혼자 옷 정리를 하면서 그렇게 많이 구시렁거려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끝도 없는 원피스의 행렬에 얼마 전까지도 원피스를 사지 못해 안달이었던 내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옷을 정리하는 그날도 마침 회사에서 택배를 받아오던 참이었다. 새로 산 투피스와 청바지를 입어보고 옷 정리를 시작했다는 걸 깜박했다. 옷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 같다. 청바지도 열 개가 넘었다. 딱 붙는 스키니진을 과연 다시 입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의문스러웠지만 일단 살 빼면 다시 입을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쟁여 놓았다. 옷걸이에 옷을 하나 둘 걸으면서 옷을 또 사면 내가 치킨을 끊는다, 하고 이를 득득 갈았다. 옷을 걸고 또 걸고 개고 또 갰다. 좀 여유롭지 않을까 싶었던 장롱은 어느새 빼곡히 차가고 있었다. 아 지겨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당분간 쇼핑몰은 얼씬도 않을 만큼 옷에 질린 밤이었다. 고른다고 골랐지만 마땅히 버릴 옷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게 문제였다. 어쨌거나 그렇게 장롱 속에 모든 옷이 들어가긴 했다.


다음날 아침, 전날 새벽 2시까지 정리를 강행한 탓에 미치도록 피곤했지만 잘 정리된 붙박이장을 보니 뿌듯했다. 출근을 하기 위해 세수를 하고 옷을 입기 위해 옷장 문을 열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입을 옷이 없었다. 이렇게 옷이 많은데! 입고 나갈 게 찾아지지 않았다. 분명 어제 옷을 정리할 때만 해도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네, 라며 숨겨진 티셔츠며 원피스들을 찾아 놓은 게 마냥 행복했는데 입고 나갈 게 없었다. 왜지? 왜 입을 게 없는 걸까? 불현듯 오래전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의 집이 나온 방송을 봤는데 우리 집 거실만한 방 하나 가득 옷들이 둘러싸고 있음에도 아침이면 입을 게 없다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옷이 잘못한 거야. 한혜현의 5분의 1도 안 되는 옷인데 입을 게 없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라,라고 미친 여자처럼 또 혼자 중얼거렸다. 버리려고 모아 놓은 옷가지들은 다가오는 주말 벼룩시장에 나가 헐값에 팔 예정이다. 재작년에도 한번 나가서 꽤 쏠쏠한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남편은 5만 원 주고 원피스 사서 2천 원에 팔아놓고 뭐가 그리 신나냐고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말이다. 여자의 옷은 그렇게 돌고 도는 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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