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과 '온전히 나답게'
단 한 장을 읽다 꾸벅꾸벅 졸지라도 잠들기 전 책을 꼭 펼치는 나는
약간의 활자중독을 갖고 있다. 전염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다 보니 아주 가끔 지인들로부터 책을 좀 추천해 달라는
제의를 받곤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책 선물만 한 게 없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선물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어떤 책을 선물하면 좋을까? 하고 묻는다.
내가 읽은 모든 책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없겠지만
그리 좋은 기억력을 가지지 못한 나는 블로그에 그 달에 읽은 책들의 제목을
쭉 적어 놓는 페이지가 있는데, 그걸 들여다보고 하나씩 내용을 떠올리며
그 사람에게 걸맞은 책을 추천해준다.
이때 나는 꽤나 심각해서 마치 의사가 약을 처방하듯 책을 골라주니
책 심리 치료사 되시겠다.(ㅎㅎ)
하지만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추천하는 책도 있다.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고르는 게 아니라
무조건 이 책은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떻게 읽든 말든 일단 추천하고 보는 책인 것이다.
그 책이 바로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과 한수희 작가의 '온전히 나답게'다.
한 권은 소설, 한 권은 에세이로 출간된 시기는 다소 차이가 난다.
한국 소설가 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다면 빼놓지 않고 말하는 김애란 작가와
최근 어라운드 잡지를 통해 연재되는 에세이를 읽고 반해 오매불망 작가의 책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알게 된 한수희 작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다.
비행운 같은 경우는 작가의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소설집으로
3번은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밑줄이 늘어나는 신기한 책이다.
그만큼 그때는 알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새롭게 또 느끼고 공감하게 된다.
모두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고 전체적으로 조금 축축한 느낌의 글들이지만
공감함에 있어서는 그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이 허다하다.
내가 좋아하고 공감하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망설여졌다.
11p)
쭈글쭈글 함부로 쌓인 옷더미가 내 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처럼 느껴져 울적했다.
지난해 내가 우쭐한 기분으로 걸치고 다닌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13p)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너의 여름은 어떠니' 중에서)
210p)
이런저런 곁눈질과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얻게 된 한 줌의 취향. 안도할 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 상품 사이를 산책할 때 나는 엄격한 동시에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여유.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식의 까다로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버리자 쇼핑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많아졌다.
('큐티클' 중에서)
293p)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 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초하네요.
296p)
왜 물이 한가득 든 투명한 비커 안에 스포이트로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아름다운
뭉게 구름이 생기며 액체의 성질이 바뀌게 되잖아요? 그때 제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요.
('서른' 중에서)
각기 다른 인물과 상황의 모두 다른 이야기지만 소설 하나하나가 내 이야기 같았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선 싸구려 5천 원짜리 티셔츠라도 매일 사 나르며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었던 20대의 내가 보였고,
'벌레들'에서는 현관에서는 1층인데 방으로 들어가면 반지하나 다름없던 집에서
자취하는 동안 곰팡이와 골치 아픈 화장실 냄새를 아로마 향초와 디자인 조명으로
버텨낼 수 있다며 끊임없이 화분을 사 나르고 하다못해 휴지도 향기 나는 휴지만 쓰던
20대 후반과 예상치 못했던 임신으로 온갖 불안들로 인해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던 2년 전이 오버랩됐다.
뿐만 아니라 '서른'은 그중 가장 좋아하는 단편으로 실제로 대학시절 같은 과에 친하게 지냈던,
학년은 같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던 언니가 다단계에 빠져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순식간에 삶이 무너지는 걸 보았던 대학시절이 겹쳐지기도 했다.
나는 비행운을 두 권 갖고 있다. 하나는 회사에 뒀고 하나는 집에. 특히 비가 많은 장마철
억수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끔 책을 펼친다. 그 어떤 영화보다 시간 잘 가고
드라마보다 뭉클하다. 회사에서는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꺼내 읽는다.
이 책을 읽으면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아무래도 자극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운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다음은 비행운의, 어찌 보면 실천 편 같은 느낌의 에세이 '온전히 나답게'이다.
무엇보다 글을 솔직해야 계속 읽게 된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솔직하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
그 사람의 글발은 인정하고 보는 것이다. 한수희 작가의 글은 솔직 그 자체다.
나와 성향, 취향, 생각 등이 너무 비슷해서 자꾸만 찾아 읽게 된다. 어떤 글을
내가 쓴 것처럼, 마치 나인 양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많았다.
31p)
내가 동경하는 가난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지킬 것을 지키려는 가난이다.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가난이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소금을 친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
가난하긴 하지만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하루 종일 세탁공장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식당 테이블보를 빨고 돌아와
비좁은 부엌에서 타이프라이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글을 썼다는 스티븐 킹의
어쩐지 낭만적인 회상 같은 것. 전래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가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단순한 가난이다.
나에게 가난의 이미지란 이런 것이다. 추운 방에서 스웨터를 껴입고 양말을 겹쳐 신은 채로
뜨거운 차를 홀짝이는 여자. 골목 어귀에 앉아 달빛을 감상하는 사람들.
낡은 코트 속에 소주 큰 병을 감춰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온 남자,
그리고 그의 양말에 난 구멍. 매일 스카프를 매고 집에서 가져온 차를 마시며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다는 멋쟁이 할머니.
73p)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좋지 않은 재료에 조미료를 듬뿍 넣은 질 나쁜 외식과
몇 번 입다 싫증 나서 버릴 옷들, 불필요한 잡동사니에 돈을 쓰지 않으면 아름다운 것들에 쓸 돈이 생긴다.
남들 눈에 있어 보이는 것, 남들이 다 하고 다니니까 나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 원하는 것,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작은 가치들에 돈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99p)
남들에게 별로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나쁜 버릇이 있다면 일단은 글 쓰는 시간보다
네이버 연예 뉴스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이다.
125p)
집에 와서는 그 스웨터를 입은 내 모습을 상상했다.
회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은 나는 왠지 지금의 나보다 좀 더 공정한 사람일 것 같았다.
인생의 여러 가지 면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남의 결점에 관대하고 어떤 일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흥분해서 침을 튀기며
남의 험담을 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또 충동구매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회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으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스웨터를 사기로 결심했다. 훨씬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351p)
사는 게 팍팍하고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질 때는 사실
사는 게 정말로 그렇다기보다는 마음이 좁아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밑줄을 많이 긋는 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밑줄을 그대로 워드 파일에
옮겨 적는다. 그러면 나중에 필요할 때 그 부분만 따로 읽을 수 있어 책이 없어도 유용하다.
비행운도 그렇지만 온전히 나답게는 적어 놓은 글만 해도 A4 15장이 넘는다.(비행운은 아마도
더 많을 것이다. 지금 노트북에 그 파일이 없어서 몇 장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은 '비행운'처럼 쓰고 싶고 에세이는 '온전히 나답게'처럼 쓰고 싶다.
사실 온전히 나답게는 소개하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흔한 말로 나만 알고 싶은 책이다.
나는 에세이는 이 작가처럼 쓰고 싶기 때문에 나중에 나만 몰래 보며 냉동실에 넣어둔 홍시처럼
하나씩 빼먹고 싶다. 그만큼 이 책이 좋다.
다른 얘기지만 이 작가의 블로그에 갔다가 우연히 작가가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우리 동네(정확히 말하면 친정동네)에 작은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직 가보진 못했다. 가면 책에 꼭 사인을 받아야지.
이 두 권의 책이 어떤 상황일 때 읽으면 좋아요, 이런 건 잘 모르겠다. 두 권 다 읽고 나서 기분이 그리
명랑해지리란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금 울적해질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이 두 권의 책이 너무 좋아서, 제가 좋아하는 책을 추천드려도 될까요?라는 질문에 오케이라고 하면 주저 없이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