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파티

해롤드 핀터의 <생일파티>에 관한 고찰

by 김민우
NZ0mLYITX4NVkOMTtgOq3MI0XGvr2UvEp1l3jJE8X6PQa2PjoznP02sHZAYbzLbv10cBwOMB7ok0F8rmUaNA4Q.webp 해롤드 핀터

해롤드 핀터는 영국의 부조리극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생일파티>가 있다.


생일파티는 우리가 생각하는 부조리 문학인 <이방인>, 알베르 카뮈하고는 결이 다르다. 이방인은 이미 무의식의 부조리에 순응한 뫼르소를 비판하며 허무주의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 있다면 -특히 이런 비판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에서 드러난다.- <생일파티>는 부조리에 무너지는 개인을 희극이라는 형태에서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희극은 개인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가지 방법을 쓴다. 행동, 대사, 그리고 독백이다. 소설에서 내면 묘사를 희극에서는 독백을 통해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이 있는 연극상 독백은 훌륭한 도구라 할 수 있겠다.독백은 또한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장치인데, 관객들은 이런 독백에 반응하여 극에 더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거리를 두는 독백이 되려 관객들을 더 끌어당기는 것이다. 확실히, 독백은 관객에게 연민과 공포를 직접적으로 준다.

이런 독백이 <생일파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핀터는 어떠한 방법으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힐까? 아니, 그는 좁히지 않았다. 되려 관객과의 거리를 무대와 객석간의 거리 보다 더 떨어뜨려 놓는다. 하지만 이 거리는 관객을 동시에 부조리에 참여시킨다.

핀터가 부조리를 드러내는 방법은 현실적이다. 부조리는 우리에게 때를 알리고 찾아오지 않는다. 골드버그네는 급작스레 잠깐의 기상예보같은 소식 이후에 등장한다. 부조리는 우리의 의사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늘이 스탠리의 생일이든지간에 그건 중요치 않았다. 골드버그네는 오직 스탠리에게 폭력을 가하는 데 신경쓰고 있으며 그 폭력은 평화의 끝을 낸다.

이들의 대화는 독선적이다. 상대방의 의사를 신경쓰지 않으며 폭력이라는 목적에만 추종하는 대화이다. 이들의 어투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어투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이 차이가 평화로웠던 민박집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다. 이 부조리는 평화의 얼굴로 하여 찾아와 거침없이 집 기둥을 무너뜨린다.

앞서 언급한 관객과의 거리는 관객이 등장인물 하나에게만 몰입하지 않게한다. 이 사건 자체에 몰입하게 만든다. 카뮈가 뫼르소란 기이한 시선으로 상황을 보게 했다면 핀터는 제3자의 눈으로 이 부조리를 보게 만든다. 억압된 상황은 차가워 보이지만 관객을 옳아맨다.

등장인물들은 이런 부조리에 저항 못한다. 오직 피티만이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골드버그네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신경쇠약의 스탠리가 떠나가게 놔둘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수수께끼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알베르 카뮈는 삶은 부조리고 그에 대해 반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핀터는 답변으로 무차별적 폭력의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졌다. 이 극은 끝까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스탠리는 미쳐버린 건가? 골드버그네는 무엇을 하러 왔지? 루루는? 매그는? 핀터는 이에 대해 침묵했다. 수수께끼를 우리가 언제부터 답을 다 알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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