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나누는 배려, 수영장에서 배운 것들
내향형 중의 내향인이다. 땅 위에서의 사회생활은 낯설고 어렵다. 그런데 수영인으로서 물속 사회생활은 그 모든 수고로움을 즐겁게 감내하게 만든다. 수영장의 사회생활은 레인보다 샤워실에서 먼저 시작된다.
라커룸에서 살색 민낯의 몸으로 다른 사람의 동선을 막지 않도록 조금 옆으로 비킨다. 바닥에 물을 흘리지 않도록 수건으로 몸을 잘 닦는다. 누군가 깜박하고 놓고 간 사용한 타올을 발견하면 수건 정리함에 넣어준다. 화장실 슬리퍼를 다른 사람들이 신기 좋게 거꾸로 돌려놓고, 시간에 쫓기는 분을 위해 드라이어를 양보한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작은 배려를 통해 함께 공간을 쓰고 있다.
수영장에서는 몸짓이 언어를 대신한다. 레인 끝에서 마주쳤을 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한다. 먼저 출발하라는 손짓을 보낸다. 속도 조절을 위해 앞뒤 사람과 거리를 맞추는 감각을 익힌다. 물속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리듬을 읽는 감각이 발달한다.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이의 호흡을 끊지 않기 위해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감각을 익히고 또 발달시킨다.
수영은 혼자 하는 운동 같지만, 사실은 배려라는 기본기를 장착해야만 하는 운동이다.
레인을 양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은 황제수영(1인 1레인)이거나 2인 1레인을 사용하는 회원이 많지 않은 곳이다. 한적함이 장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적하기 때문에 레벨별(상급, 중급, 초급)로 레인이 나뉘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3명 이상이 한 레인을 쓰게 될 경우가 문제다. 누군가는 천천히 헤엄치고, 또 누군가는 훨씬 더 빠를 때가 있다. 이때 자신의 페이스를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느 날, 앞에서 천천히 평영을 하시는 분이 계셨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자유형과 배영밖에 못하는 내게 고민이 생겼다. 자유형으로 빠르게 치고 나갈 것인가. 배영으로 천천히 뒤따라 갈 것인가. 턴을 할 때마다 그 분을 추월할까 말까 망설였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서두르지?'
얼마 전에 읽은 책 속의 문구가 떠올랐다. "배려는 타인을 위해 나를 줄이는 게 아니라, 타인과 함께 있기 위해 나를 조율하는 일이다."
나의 흐름을 잠시 접어두고, '함께 흐르는 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한두 박자 늦춰 출발하기로 했다. 천천히 자유형으로 뒤따라가면서 물 위를 미끄러졌다.
나의 속도를 조율하는 날. 이상하게도 이런 날의 수영은 더 부드러워진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수영을 마치고 물에서 나오면, 다시 홀로가 된다. 젖은 수영복을 정리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혼자가 되어서도 서로 물속에서 나눈 조용한 배려들을 떠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짓게 된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경적, 회의 시간의 시끄러운 논쟁. 땅 위의 크고 작은 소음들은 물속 사회생활을 통해 마음에 평화를 찾게 된다.
말없이 통하는 것들. 물속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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