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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Jun 07. 2019

있었던 일, 없었던 일

일기가 되려다 되지 못한 것




현충일. 작업실 이삿날이다.


우리가 처음 구한 작업실은 상암동에 있다. 작년 7월 그곳에 들어가 새로운 세계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를 닮았지만 우리가 아닌, 우리가 담긴 것을 잘 빚어내려 고군분투했다. 처음으로 함께 원단을 골랐고, 처음으로 함께 가구를 들였으며 처음으로 함께 라벨을 만들고 처음으로 함께 옷을 만들어 팔아 보았다. 여름만 준비하다 가을이 되었고, 겨울을 준비하다 지난 연말연초를 다 보냈다. 또다시 여름을 준비하다 가까스로 봄을 났고 다시 여름을 맞이했다. 손님이 여럿 다녀갔으며 그중 약속을 어기거나 불쾌하게 굴었던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가 마련한 예쁨을 있는 그대로 느껴주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말보다 힘이 되었다. 뭐든 넉넉하지 못했지만 넘치는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새로운 동네, 새로이 꾸민 공간으로 가게 되어 설레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다.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설레지 않는다 답했다. 그런 것은 내게서 없어진 감각이 된 지 오래고, 평생 기대를 죽이는 일에 여념이 없다가 꿈도 기대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왔다가 아무렇지 않게 떠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굳은살을 키울 것이다. 기대와 실망, 희망과 낙담이 없는 상태가 이제는 더 편안하고, 그것은 이미 나를 이루는 성질 같은 것이 되어버려서 바꿀 수도 바꾸려 노력할 수도 없다.


오늘도 가족들은 나의 일을 제 일처럼 도와주러 올 것이다. 누구에게도 나는 그리할 수 없고, 그들의 뜨거움이 자주 나를 무색하게 만든다. 고맙단 말을 하지 못한 채 버벅거리다 어설픈 마음으로 돌아와 주저앉을 날.


불면이 다시 찾아왔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일어나 앉아 있다. 현실의 뇌가 늘어져 꿈까지 닿는 모양이다. 얕게라도 설핏 잠에 들면 일상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 더 해괴한 모양으로 나타나 숨 막히게 쫓아온다. 도망치다 끝나는 꿈을 요 며칠 계속해서 꾼다. 늘 꿈은 내게 벗어날 기회도 주지 않고 허망하게 몸속에서 빠져나간다. 꿈이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뭐하러 그렇게 사력을 다해 뛰었나 후회할 뿐이다. 세상엔 끝내 이겨낼 수 없는 것이 있고 내게는 나와 내 꿈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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