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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Jun 21. 2019

아직 멀리 있는 것

옷의 일기 \ 두 가지 일과 여러 가지 마음




하루가 길다. 지난밤 꿈에서는 종일 원치 않는 일을 했다. 캄캄한 밤중에도 내게는 종일이란 것이 있고 피로는 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타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등등 이런저런 '싶은 것'들을 잘 누리기 위해 나는 가르치는 일을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의 아이들을 상대하며 대부분 영어로 의사소통하고 설명한다. 아이들을 오냐오냐 너그럽게 대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또 그렇다고 사랑이 많은 선생도 아니다. 원래 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며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한다. 게다가 깊은 대화가 되지 않는, 대부분 무해하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무척 유해한 상처를 남기는 아이들을 대하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학생을 진정으로 위한다기보다 가르침이 쓸모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가르치는 일은 내 삶에서 언제까지나 수단일 뿐 목표나 성취가 된 적이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꿈꿔오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금방 행복해질 줄 알았다. 머릿속에 상상하던 옷이 내 눈앞에 걸려 있을 때, 내가 생각해도 봉제가 끝내주게 잘 되었을 때, 가끔씩 모르던 사람이 찾아와 아름답단 말을 해줄 때, 다 만든 옷을 착착 접어 낭창한 비닐에 포장할 때, 종일 정신도 없이 작업을 하다 동료와 맥주를 한 캔씩 따 마실 때. 좋은 기분은 여전히 가끔씩 나를 찾아온다. 가끔이라도 와주면 과장하지도 않고 비하하지도 않고 온전히 잘 느끼며 그만큼 잘 떠나보낸다. 기쁨과 행복 사이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지속성'인 것 같다. 기쁨이 서로 다른 높낮이로 하루하루 맺혀 있으면 좋겠다. 작은 일에서 즐거움을 계속 발견했으면 좋겠다. 줄곧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 하고 행복이 온 걸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가지 일을 하며 바삐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인들은 부럽다거나 멋지다, 대단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으니 그밖에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제 숨이 턱 하고 막혀온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게 되었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칭찬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이의 것을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위해주고 싶다. 고단한 마음, 바깥으로 티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른이 되고부터 할아버지는 늘 내게, 어렵지? 하고 물었다. 힘들지? 묻지 않고. 걱정을 끼칠까 웃는 얼굴로 애써 무장을 해도 인사처럼 듣던 말이다. 나는 그 어렵단 말을 참 좋아한다. 말 안에 들어있는 '어쩔 수 없음'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어렵게 아파하다 떠났고 이제는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요즘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종종 들려준다. 어렵지? 언제 나도 물어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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