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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Jul 19. 2019

하나뿐인, 만연한, 시에게

누가 시를 읽는가




 개학이 얼마 지나지 않은 봄이었고, 초록이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던 한낮이었어요. 그때 당신이 내게 툭 떨어졌습니다. 나무 아래 가만히 서있다가 머리에 도토리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어요. 빨간 교복을 입은 친구들은 주변에서 쉴 새도 없이 떠들고 나는 오로지 당신과 만나기 위해 그곳에서 멀리 떠나와 앉았습니다. 당신은 막 태어난 아기 같았고, 인생을 다 살아본 노인 같았으며, 밋밋한 미술 작품 같기도 했고 들리지 않는 음악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더듬더듬 읽어본 첫 경험을 나는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따뜻해서 안도했고 매서워서 든든했어요.


 그 뒤로 당신을 어느 사진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무심하게 어질러진 책상 사진이었는데, 분홍과 갈색이 섞인 표지가 아름다웠습니다. 이름은 또 어땠고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당신을 데려다 읽으며 처음으로, 글을 읽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드는 마음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때 나이를 많이 먹은 친구에게서 "사랑하면, 정말 사랑하면 모든 것이 쉬워진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거든요.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아무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마종기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중에서,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수록



 한 번은 내가 멀리 떠나 살아야 했던 적이 있는데요. 겨울이 여름으로 오는 신기한 나라였어요. 타국의 말을 쓰고 글을 읽으며 당신 없이도 꽤 오랫동안 잘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털썩 앉아 당신을 떠올리게 된 거예요. 당신을 어떻게든 다시 만나야 했지요. 오래 헤어졌다 만난 당신은 만질 수도 없이 바싹 마른 가지처럼 야위어 있었습니다. 건드리면 으스러질 것 같은 당신을 아주 조심조심 펼쳤습니다. 무더운 날이었고, 이따금 아득하게 이국의 말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다 사방이 고요해지더니, 당신이 밀물처럼 반짝이며 밀려들고, 나는 순식간에 당신 안으로 헤엄쳐 들어가 당신을 파헤치고 알아갔습니다. 사랑이 거대한 파도로 온 날이었어요. 우리에게 와 부서졌다가 끝없이 살아나는 사랑을 그때 당신이 일러주어 알았습니다.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허수경 「레몬」 중에서,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사는 게 바빠 잊고 지낼 때도 있었지만 여기에 이렇게 와 살면서 나는 당신을 사람보다 더 자주 찾았습니다. 당신에게 손을 뻗고 당신 안에 웅크리며 지내고 싶었어요. 당신은 나보다 충분히 늙었으며 훨씬 더 생생했습니다. 그것이 몹시 부러웠으나 시도 때도 없이 녹아내렸고 당신에게로 흘러가 당신에게 스며들었지요. 그런 날엔 꼭 당신이 나인 것 같았고 내가 당신이 된 것 같았습니다. 어느 때엔 당신이 나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갔고 다시 오지 않는 당신을 만나러 자주 집을 나섰습니다. 당신은 멀리 있었으나 나는 그 거리를 마음 깊이 사랑했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에게 가는 동안 슬펐으니까요. 황홀하게 슬펐습니다. 생각해보니 그즈음부터 당신을 쓰기 시작했네요. 읽을 때는 당신을 아는 것이 슬펐는데 쓸 때는 당신을 몰라서 슬펐습니다. 당신은 때때로 고통스럽게 몸부림쳤고 나는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기만 했어요. 그것이 두고두고 미안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아프게 살아있어요. 그리고 끝없이 당신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도 내게 온 적 없는 당신, 이제는 나를 좀 사랑해주세요.



당신을 만난 후부터 길은 휘어져

오른쪽으로 가도 왼쪽으로 가도 당신을 만나요


길 안에는 소용돌이가 있고 소실점도 있지만

뒤섞여버린 인생과 죽음과

사랑과 체념이 있지만


서로에게 닿을 듯이 멀어지는 타인들의 거리에서


당신이 사라져버린 후에 나는 전율하는 모든 순간들에게

묵념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


그것은 우리가 물어뜯고 해체한 시간이에요

나에게 온 적이 없는 당신의 시간이에요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문장을 쓰고 있어요



-박서영「타인의 일기」 중에서,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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