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를 읽고
겨울이 지척에 왔다. 그 얘기를 해주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
가을에는 뭐라도 읽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지냈다. 읽을 땐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 것 같고 쓸 땐 내리는 비를 다 맞고 있는 것 같다고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읽을 때 가장 평온하고 쓸 때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라 했던 말. 단지 조금 평온해지기 위해 시, 수필, 장편, 단편 소설, 평론, 신학서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읽지 않으면 더 이상 쓰지 못할 것 같았고 쓰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희망과 기대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처음에는 그저 지속되는 시간에서만 차이가 있는 줄 알았죠. 희망이 좀 더 멀리 있는 일을 기다리는 거라고 말이에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그게 차이점이랍니다.
(...)
몸이 하는 기대도 그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존 버거,『A가 X에게』중에서
희망이 없다고 사랑을 쉽게 벗어던질 수는 없다. 대신 영원히 기다리는 일을 소설 속 아이다와 내가 함께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자리가 없다.
그러나 슬픔에 잠긴 아이다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따라 책을 읽다 보면 주먹을 꼭 쥔 내가 보인다. 아이다와 손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은 저절로 시작되지만, 사랑을 지속시키는 데는 많은 힘이 필요하다. 무릅쓰는 것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지 않으려면, 자꾸 옅어지는 기억과 온도를 사력을 다해 붙잡아야 한다. 저만치 멀어지는 기쁨을 쫓아가 데려와야 한다. 그늘 안에 볕이 들 때까지 추위를 견뎌야 한다. 지나가는 계절 안에서 상대를 계속 발견해야 한다. 함께 좋아하던 곳을 물끄러미 떠올리지만 말고 혼자서도 가보아야 한다. 가끔 울고 싶지 않아도 울어야 하고 걷고 싶지 않아도 걸어야 한다. 그렇기에 지난 가을처럼 오는 겨울도 힘들 것을 안다.
하나뿐인 내가 하나뿐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가도, 우리 모두 하나뿐이기에 사랑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랑을 안고 가을에 누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