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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 Mar 27. 2019

유년의 유년

옷의 일기 \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어릴 때는 롯데월드 근처 주택가에 살았다. 어느 날 자이로드롭이 뚝딱 지어지더니 얼마 안 가 떨어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몇 분에 한 번씩 들려왔다. 어릴 땐 그게 소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은 우리 동네에는 조봉춘 제과점이 있었고, 비디오테크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집안에 굴러들어 온 전화기에는 주변 상점들과 단번에 연결할 수 있는 단축 버튼이 붙어 있었다. 그걸 이사 올 때도 가지고 와 오빠와 장난 전화를 건 적이 여러 번 있다. 내가 처음 느낀 그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땐 그게 그리움인 줄을 몰랐다.


동네에는 놀이터가 세 군데나 있었고 우리는 그 셋 중 어느 곳에서 놀까 매일 고민했다. 나는 임광 아파트 옆에 딸린 작은 놀이터가 가장 좋았다. 그곳은 아파트 옆쪽에서 시작해 아파트 뒤편까지 이어지는 기역자 모양이었고, 나는 그 숨은 공간이 좋았다. 거기엔 모래놀이를 할 수 있는 모래장이 나무로 된 낮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도 가장 고립된 그 공간을, 낮에도 어둡고 밤에는 습했던 그 공간을 왜 가장 좋아했을까. 날이 좋지 않을 땐 임광 아파트에 살던 문희진의 집으로 가 내 마음의 풍금이나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영화들을 보고 또 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병원 놀이를 하기도 했고 그러다 저녁때가 되면 다 함께 나가 석촌호수를 빙 두른 산책길을 걸었다. 호숫가의 난간을 한 칸 올라서면 물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일렁이는 두꺼운 물결을 보면서 나는 그게 슬픔인 줄을 몰랐다. 그러다 언젠가, 그 물결 속에 분홍색 디즈니 슬리퍼 한 짝을 빠트렸을 때, 내 살에 닿던 것이 저기 멀리까지 천천히 떠밀려 갈 때. 그때 알았다.


롯데월드 옆에는 롯데백화점이 있었고, 나는 거기 딸린 수영장에 다니느라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투명한 백화점 엘레베이터를 거의 매일 지나쳤다. 때때로 그것을 타고 오르내리며 엄마와 쇼핑을 하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자기 맘에 드는 옷을 입히고, 이게 예쁜 거야 저건 아니야 라고  말했다. 왜 저건 아닌지를 모른 채 그냥 그렇구나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엄마는 비싼 옷을 척척 잘도 사주었다. 그땐 그게 왜 예쁜지를 몰랐는데, 지금은 잘 알고 있다. 백화점 안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내려가는 길에 작은 스크린으로 온갖 패션쇼 영상을 틀어주었다. 절대 입을 수도 살 수도 없을 것만 같은 우스꽝스러운 옷이라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백화점에 가면 꼭 그 영상을 집착적으로 바라봤다. 어떤 장면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아 모델의 생김새나 화장법, 헤어스타일과 색감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예술로서의 옷, 패션이라는 것을 접한 첫 경험이었다. 런웨이에 서는 옷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은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후다. 그 시기에 나는 옷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좋아하는 외국 디자이너의 이름들을 병적으로 외웠으며, 한때 옷이 나의 전부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 옷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옷은 나의 전부가 아니며 나의 전부가 옷인 것도 아니다. 옷은 내 일이자 생활이자 통로다. 세상에 없었던 것을 하나씩 내놓을 때마다 내가 아는 것이 하나씩 늘어난다.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일이 어찌 늘 반가울 수 있을까. 허나 몰랐던 것을 여전히 모르는 것은 더 싫다. 요즘엔 다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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