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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Dec 19. 2019

내가 세상을 더 무섭게 만들었을까

소심한 내가 비겁하기까지 했다

나는 인천에 살고 있지만 서울에 나갈 일이 많아 교통편으로 인천지하철과 공항철도를 자주 이용한다. 그 날은 홍대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항철도를 타고 계양역에서 인천지하철로 갈아탔다. 노곤했기에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불쑥 주위가 소란스러워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앞을 봤을 때 40-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쓱 지나갔다. 무어라 큰 소리로 고함을 치면서. 순간 나는 나에게 하는 소린가 싶어 몸을 움츠렸다. 


나뿐 아니라 주위에 있던 탑승객들 모두가 그 아저씨를 슬금슬금 눈으로 쫓았다. 슬금슬금 쫓은 건 눈이 마주치는 타이밍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도 역시 그랬다.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불쑥불쑥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화를 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간혹 웃으면서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 건 아닙니다.' 하고 나긋나긋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 이상한 온도차 때문에 일이 어떻게 심각하게 굴러갈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나는  그 아저씨가 자신이 있던 객차를 통과하고 옆 칸으로 옮겨갔을 때 안도했다. 어떤 험한 꼴을 천운으로 피해 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위에 있던 승객들도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시선은 계속 그 아저씨의 등을 쫓았지만 그뿐 각자 핸드폰을 손에 쥐고 보던 인터넷 뉴스를 마저 보거나 보내던 카톡을 마저 보내는 식이었다. 


그러다 옆 칸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아까 그 아저씨의 고함소리가 이어졌다. 분명 누군가와 싸움이 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지하철 경찰대 신고번호를 찾았다. 그러다 그냥 112에 신고하면 되겠구나 싶어 스마트폰의 통화 화면 창에서 112를 눌렀다. 하지만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순간 누구 다른 사람이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있는 사람도 옆에 있는 사람도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저들 중 누구 하나는 신고를 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옆 칸의 실랑이는 역 하나를 지나치는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나의 망설임도 함께했다.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눌러야 할까, 말아야 할까. 누가 신고했겠지. 하지만 아니면 어쩌지. 그런데 내가 꼭 신고할 필요가 있나? 아니, 저러다 말지 않을까. 무슨 큰일이 나겠어? 자꾸만 현실을 외면하고 그 모든 상황이 자신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이라고 미뤄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고를 하면 내가 무슨 해코지라도 당할 것처럼. 


당장 그 고초를 당하고 있을 사람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행히 내가 고민을 계속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다음 역에서 지하철은 정차했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신고가 들어와 잠시 역에서 정차하겠다는 방송이었다. 문이 열려있었고 소란은 바로 옆 칸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지하철 경찰복을 입은 서너 명의 남자들이 뛰듯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행이다, 괜찮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나 자신은 괜찮지 않았다.


만약 그 모든 일의 주인공이 자신이었을 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했던 고민을 하면서 신고하지 않는다면, 하는 무서운 가정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이미 험한 일이 일어난 후에는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생각을 한 자신이 무서웠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도 어쩐지 몸에 한기가 돌았다. 나 스스로가 세상을 한층 더 무섭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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