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유미 Nov 28. 2019

나는 친절한 종업원을 좋아하지만

그들은 정말 좋아서 친절한 걸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친절한 종업원을 좋아한다. 말 한마디라도 눈웃음 하나라도 가능한 친근하게 편안하게 보여주는 쪽을 좋아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나도 좀 더 부드럽게 말하고 없는 눈웃음을 끌어모아 미소 짓게 된다. 보는 사람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어느 순간 과하게 친절한 미소와 한 옥타브 높은 ‘솔’ 음을 유지하는 새된 목소리를 듣는 게 안쓰러워졌다. 생존과도 관련된 문제에서 살기 위해 나오는 버둥거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존본능이란 건 거의 모든 동물이 가지고 있다. 상위 포식자에게 위협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 동물은 물론이고 이미 우리와 친숙해질 대로 친숙해진 개에게도 그 생존 본능이란 게 남아 있다. 그 본능 중 하나가 정말 아픈 곳은 숨긴다는 것이다. 



상위 포식자에게 취약함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생존을 위해 아픈데도 안 아픈 척하는 것이다. 나는 고등생물이라고 하는 인간의 생존본능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고 말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해도 엄연히 상위 포식자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상위 포식자를 제외한 이들은 힘든데 힘들지 않은 척하고, 기분이 나쁜데 나쁘지 않은 척하고, 상처 받았지만 받지 않은 척해야 한다. 그걸 감정노동이라고도 한다. 느낀 바대로 행동하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말이다. 그리고 많은 아르바이트생, 종업원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 안에 속해 있다. 그뿐이겠는가. 출, 퇴근을 하거나 출, 퇴근을 하지는 않지만 직접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프리랜서에게도 엄연히 존재한다.



나 역시 그 안에 속해 있었고 속해 있다. 벌써 몇 년이나 전의 일이지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술 취한 아저씨한테 소주병으로 맞기도 했었다. 물론 놀랍게도 소주병은 깨지지 않았다. 그게 소주병이 내 머리보다 단단했기 때문인지 아저씨가 술에 취했기 때문인지 내 머리가 소주병보다 단단했기 때문이지는 모르겠으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경호업체를 호출했고 그 아저씨는 도망을 가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 아저씨가 그대로 도망간 게 다행인지 그대로 시비가 붙어 아슬아슬한 순간을 맞이하다가 경호업체가 들이닥쳐 그 아저씨를 붙잡아가는 게 다행인지 헷갈린다. 나중에도 두고두고 그 아저씨를 처벌하지 못했던 게 욕이라도 한 마디 해주지 못했던 게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경호업체 사람들 앞에서 쪼는 모습이라도 봤으면 기분이 조금 나았을까.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어도 나는 계속 그 편의점에서 일을 해야 했다. 편의점 사장은 괜찮냐고, 묻기는 했지만 놀랐을 텐데 일찍 들어가 쉬라고는 하지 않았다. 물론 시간 단위로 짜인 스케줄을 교대제로 운영하는 곳이므로 그도 쉽지 않음을 감안해도 역시 비인간적이다. 자기 딸자식이 그런 일을 당했어도 그래도 알바 시간을 채워야지, 할 수 있을까.



당시에는 그래도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내 몫을 해낸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걸로 나는 좋은 아르바이트생이고, 성실하고 건실한 청년이니 된 거라고. 대체 뭐가 되었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그렇게 되뇌었다. 



책임감이란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게 주어진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이를 악물고 해내는 게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주입식으로 교육받았을 뿐이다. 



내가 꼭 그런 상황에 노출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도 그 어떤 사람도 스스로를 ‘괜찮다’ 자위나 하는 게 전부인 상황 속에 있지 않았으면 한다. 괜찮지 않은 건 괜찮다고 할 필요가 없다. 괜찮지 않은 건 피력해야 하며 그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인간이라면, 아니 그 어떤 존재라도. 누군가가 고통을 짊어지고 다른 누군가는 그 위에서 일말의 편안함, 안락함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중에야 그때의 편의점 사장에게 한마디 해줬어야 함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 안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들어가서 쉬게 해 주세요. 인간적으로. 



일말의 책임감을 가지고 덧붙이자면, 내일은 정시에 출근하겠습니다. 



사실 난 그때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고 산재를 신청해야 함이 옳다. 그리고 산재가 적용되어야 함도 옳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는 게 현실인 건 옳지 않고.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세상을 더 무섭게 만들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