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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Jan 10. 2020

재주문

생활을 이어가는 소소한 결심


캐리커쳐 주문을 받으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을 말하라면 단연 재주문을 처음 받았던 순간이다. 그때의 벅참은 이후에 있었던 재주문과도 달랐다. 주문자의 이름에 재주문이라는 글씨가 딱 보이는데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심쿵이 이런 거구나, 남자 친구도 못 하는 일을 주문자가 해냈다. 



처음엔 주문자가 자신과 남자 친구를 함께 그리는 캐리커쳐를 주문했고 그 이후에 결혼할 친구에게 줄 선물로 친구 커플의 캐리커쳐를 주문했다. 신기하게도 유난히 잘 그려졌던 주문자 커플의 그림은 지금도 내가 상품 이미지 첫 화면으로 허락을 얻어 사용하고 있다. 유독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는데(주문자 커플의 익살맞은 표정이나 얼굴 특징이 잘 표현되었다) 주문자의 만족도도 높아서 뿌듯하고 흐뭇하고 내 머리를 스스로 토닥여주고 싶고 그랬다.



하지만 재주문을 받았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 긴장도 되었다. 실망시킬까 봐. 먼젓번의 작품이 어쩌다 잘 그려진 작품이다 라는 평가를 받게 될까 봐. 정말 무서웠다. 



나는 지금도 그런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한다. 아직도 스스로의 실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한편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의 작품을 부끄럽게 여긴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실력이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게 느껴졌다. 교육을 받았더라면 그런 생각이 덜 들었을까 싶지만 실제 미대를 나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저 개인의 성향이나 마음가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부담을 이겨내고 주문을 완료했을 때 ‘감사합니다. 작가님. 고생하셨어요. 친구가 너무 좋아할 것 같아요.’라는 메시지를 보며 조금, 아주 조금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조금이라고 한 이유는 정말 어떤 대단한 결심과 결의를 느끼며 한 생각이 아니어서이다.



그저 그 순간이 행복해서 그 짧은 행복에 기대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 결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순간순간 찾아오는 그런 작은 결심을 통해 일을 지속해 나간다. 대단한 결의 없이 작은 순간에 집중하면서. 2년 넘게 꾸준히 홀로하는 이 일을 지속해 올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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