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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Aug 09. 2020

하던 일을 하는 건 어렵지만

나만 그런 거 아니죠?

하던 일을 하는 건 어렵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프리랜서 작가였다. 일러스트레이터로 그림을 그려 돈을 대가로 받아 그럭저럭 먹고살았다. 독립출판도 했고 그 덕인지 어쩐지 출판사와 정식 출간 계약도 했다. 하지만 그 끝없는 불안정함과 롤러코스터를 타듯 날 덮쳐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싸우는 것에 내가 꽤 많이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겨웠다. 월급이 없는 생활, 벌다가도 못 버는 날이 오는 생활, 그럴 때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쪼개고 쪼개서 그 허름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선택했다. 회사를 다니기로!


월급쟁이가 되는 길은 쉬웠다. 애초에 나는 나의 적성을 살려서 취직하려는 생각이 없었고 이제 와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젊고 유능한 이들을 제치고 취업에 성공할 배짱도 없었다. 가장 취업이 쉬운 직종을 선택해서 면접 날조차 초조하거나 불안하다는 생각 없이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잘 먹고 잘 잤다. 그러고 나니 합격 전화가 왔다.


2020년 3월부터 직장생활이 시작되었고 시작되고 한 달 만에 코로 19 때문에 자택 근무가 시작되었다. 벌써 5개월째에 접어든 자택 근무… 신기하게도 나는 지금 월급쟁이가 되었는데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집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던 그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삶이 규칙적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만 바뀌었달까.


그리고 월급쟁이 6개월 차인 지금은 약간 습관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고 있는 나를 깨닫고 소스라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정말이잖아! 왜 소스라치냐 하면 불과 3개월 전 만해도 이 월급쟁이 생활이 못 견디게 힘들고 지겨웠기 때문이다. 도통 이게 적응이 되고 아무렇지 않아 지는 날이 온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5일은 일하고 나머지 이틀 간만 쉴 수 있는 생활은 10년 넘게 프리랜서로 정말 프리 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다시 군대에 가거나(미안, 가본 적은 없으나 다양한 영화, 드라마를 섭렵하여 상상해보았다) 감옥에 가거나(마찬가지) 수능을 100일 남긴 예비 수능생이 되는 것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그래서 금요일만 되면 그렇게 캔 뚜껑을 땄다. 보리로 만들어진 나의 친구는 견딜 수 없는 일상을 잠시 내려놓게 해 주었다. 동시에 겨우 이틀 그 귀하디 귀한 휴일을 순삭(순간 삭제)하게도 만들었지만.


어느 날이었다. 캔을 따면서 정말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다. 아, 신발. 내 신발. 네 신발. 우리 모두의 신발!! 때려치운다. 정말 때려치우고 만다. 이거 해서 얼마나 번다고 내가, 어? 내가!!


이런 누구에게 닿길 원하는지 모를 외침을 속으로만 외치면서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조금 취기 올랐나, 싶었는데 번뜩 이 기분을 이렇게 흘려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기분! 이 느낌!! 이걸 붙잡아야 한다(취한 게 분명하다)!!


그래서였을까(취해서). 그림 낙서로 가득한 노트에 노래 가사를 적기 시작한 게. 흥이 나는 건 아니었는데 정체불명의 멜로디를 흥얼거린 게. 믿을 수 없게도 500짜리 맥주 4캔을 비웠을 즈음 나는 8년쯤 내 곁을 지킨 기타를 품에 안고 노래 한 곡을 뽑아내고 있었다.


몇 개 겨우 알고 있는 기본 코드를 멜로디에 얹으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니 새삼 ‘나는 천재인가’ 싶은 화려한 착각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나의 염원이 가사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설핏 말랑말랑한 사랑노래 같지만 그 끝에서는 결국 민망한 속내를 드러내고 마는 노래가 만들어진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노래를 뽑아냈으니 이젠 그걸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했다. 나는 얼른 통기타 동호회에서 친해진 언니에게 녹음파일을 보냈다(술은 친구이자 원수가 분명하다). 정말 놀라운 것은 나의 녹음파일을 들은 언니의 반응이었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멜로디 진행과 노래 부르는 나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좋다고. 노래를 들으면서 설레었다는 언니의 반응.


그 말에 오히려 내가 설렜다. 하지만 나는 언니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을 정도로 내가 나이를 먹었으며 어느 정도 세상사를 많이 겪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 가지 레퍼런스를 보여주며 다 같이 직장 때려치우고 밴드를 꾸리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는 언니와 언니의 남편에게는 별 수 없었다. 인정할 수밖에. 내 노래가 그 정도는 될 정도로 괜찮았음을. 아니, 그들에게 어떤 작은 희망이랄까, 의지를 심어줬음을.


지금도 종종 그들과 만나며 만든 노래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또는 수정한다. 나는 노래하는 유튜버가 되는 한 줌도 안 되는 꿈을 꾸며 2번째, 3번째 곡을 만든다. 9월에 결혼하는 그 친한 언니의 결혼식에 축가를 불러달라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으면서 나의 데뷔 무대가 정해진 것도 운명일까. 


아니, 나의 운명은 내가 무언가를 흘려버릴 수 없다고 느낀 그 순간이 있었으며 그 순간에 (취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 또 그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공개할 수 있었으며 그 무언가를 긍정적으로(사실이든 아니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던 그 하루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 운명적인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순간의 선택이 응집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른다한들 그것이 저 사람의 삶의 끝에 위치한 어떤 창작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을 선한 눈으로(조금 측은함도 뒤섞인)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지금도 나는 사실 글을 써야 하지만 그 하루의 일탈이 만들어낸 운명 또는 기적 때문에 팔자에 없는 화성학 책을 뒤적이며 노래를 만들고 있다. 대체 왜 하던 일을 지속하는 것은 그렇게 힘든데, 




새로운 일을 하는 건 이렇게나 즐거운지. 제발 나만 그런 게 아니길. 






#나도작가다공모전 #에세이 #작곡 #작사 #나도한다 #너도하자 #윰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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