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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Feb 22. 2021

샤워볼의 정체

이까짓, 털

샤워볼의 정체 



“여자들 화장실엔 뭐가 너무 많아. 다 낭비야. 이상한 천 같은 게 있어. 샤워볼이래. 그런 게 왜 있는 거야. 가슴에 털이 왜 있어! 거품 내라고 있는 거야. 아래에도 거품 내는 부분이 있어요.” 얼마 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들은 남자들의 샤워법이다. J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이 사실이냐고. “응.” 아주 별일 아니라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찔했다. 당장 집에 있는 욕실의 비누를 모두 처분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다시 한번 물었다. 


“요즘도 그렇게 해?”

“아니.”
“왜?”
“샤워볼이 있잖아.” 


아,그렇다.우리가함께살고있는집의욕실에는샤워볼이 걸려 있다. 십년감수했다는 말을 지금 써도 될까. 그러면서 불쑥 ‘왜?’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인류의 진보는 모두 ‘왜?’에서 시작되지 않던가. 나는 새로운 세계로 진일보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하는 건데?” 


J는 나의 진지한 질문에 드디어 이상함을 감지한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덤덤했다. 기가 막혔다. 차마 “더럽잖아!”라고는 말 못 하고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스무 살 무렵 군대에 가서 처음 알게 된 방법이라고 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니 군인 월급이 10만 원 초 반이었을 때다. J는 해군이었지만 그래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소한의 물품만 지급되는 마당에 샤워 볼은 사치품에 가까웠다고 한다. 월급으로 살 수도 있었지만 그 쥐꼬리만 한 돈을 쪼개 굳이 샤워볼을 구입 하는 짓을 누가 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은 먹고 자고 씻는 행위를 반복 해야 했다. 무엇보다 씻을 때는 남녀노소 누구나 비누에 거품을 내서 사용한다. 특히 몸을 씻을 때는 많은 양의 거품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진 게 두 손뿐이니 거품을 내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씻기 위해 그들은 그곳을 이용했다. 많든 적든 누구나 그곳에는 털이 있으니까. 그리고 대부분 자연스럽게 팔을 늘어뜨리면 그곳에 손이 닿는다. 힘들이지 않고 꽤나 자연스럽게 거품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음, 그래. 그럴듯하군. 하지만 솟구쳐 오르는 심리적 인 거부감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J에게 이 집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며 엄포를 놓았지만 그날 이후로 한동안 비누에 묻어 있는 작은 눈썹에도 민감해지고 말았다.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네이선 렌츠의 저서 《우리 몸 오류 보고서》에서 인체의 진화와 퇴화에 관해 읽은 적 있다. 진화는 생존과 연결되지만 퇴화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없어져도 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꼭 반드시 없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닌 이상 굳이 퇴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정말 아주 오랜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왜 털은 아직도 인체에 남아 있을까? 시대마다 어떤 의식의 일종으로, 또는 부가적인 미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제모가 행해졌다. 그러니까 털을 없애려는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시대마다 있었다. 게다가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도 있듯이 인간은 바라는 것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이루고야 마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왜 털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가. 

아니, 정말 레이저로 모근을 태우는 것만이 반영구적으로 털이 더 이상 자라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그마저도 허술해서 5회에서 10회, 많으면 15회 이상 시술을 받아야 하고 사람에 따라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심지어 2, 3회 정도 시술 받으러 갔다가 귀찮아서 중도 포기하게 되는 그런 방법이 정말 현대에서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인가(깎고 뽑는 걸 제외하면). 

진화론이 말해주듯 털은 반드시 없애야 하는 존재가 아님을 사람들도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 같다. 미용, 위생, 치료 등의 이유로 제모하지만 정말 적극적으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다면 더 맹렬히 연구했을 텐데 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전 인류가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국가의 통치자들이 깨닫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바이러스와 백신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만약 털이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 속에 던져졌다면 다른 방법이 제시되지 않았을까. 


사실 털의 존재 이유는 확실하다. 신체가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돕고, 외부 충격이나 외부 환경으로부터 마찰을 줄여준다. 먼지나 세균의 침입까지 막아주고. 털이 난 부위나 목적에 따라 그 모양새는 곧거나 곱슬 거린다. 눈썹이나 속눈썹, 코털은 직모지만, 머리카락이 직모인 사람도 겨드랑이털과 음모는 구불거린다. 곱슬거리는 털은 공기를 더 잘 통하게 해주고 같은 양의 피지와 땀 속에서도 덜 기름지게 해준다. 피부를 조금 더 통풍이 잘되고 보송보송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털의 가치는 놀라웠다. 

정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가지고 태어난 털을 유지하고 사는 게 유익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때에 따라 부족한 삶의 질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향상시킬 수 있는 용도로도 쓸 수 있지 않은가. 뭐, 너무 예상 밖이긴 했지만.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없어져야만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인체의 기능은 퇴화하지 않는다. 모든 생물은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 밉든 곱든 없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건 사실 없어져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하는 일에는 쓸데없는 일이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하는 일에는 쓸데없는 일이 많다. 물론 샤워볼로 쓰기 위해 또는 그 자연적인 필요 때문에 제모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자연이 하는 일을 애써 인간의 상식과 편견에 빗대 어렵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다. 

나중에 정말, 정말로 겨드랑이털이나 코털, 다리털, 손가락털도 요긴하게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아니, 근데 털의 존재 의의를 이렇게까지 말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조금 머쓱하군.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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