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에세이] 수치란, 분노보다

#004_나만 창피한 거 아니죠?

by 정유미

초등학교 5학년 , 남들 보기엔 어리지만 스스로는 어리지 않다고 자부하는 자아가 막 자라고 있었을 즈음이었다. 나는 변비가 심한 아이였는데, 한 번씩 변을 볼 때면 예고 없이 훅 치고 나오는 바람에 곤혹스러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훅 치고 나오는 변은 쉽사리 참을 수가 없어서 더욱 곤혹스러웠다. 초등학교 화장실은 하나같이 더럽고 막히는 칸이 많았기에(정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화장실 청소 당번이 돌아오면 절로 우울했다. 다른 모든 아이가 그랬을 거다.



화장실 청소는 매주 각 반에서 돌아가며 당번을 맡았다. 그 날은 우리 반이 화장실 청소 당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날 중 하나였는데 수업이 다 끝나고 청소시간이 다가오기 전 그때, 신호가 왔다. 무시할 수 없는 그 신호가.



그때까지도 나는 학교에서 변을 보는 일을 조금 남세스럽게 여겼다. 가능하면 집에 가서 비밀과 안전을 보장받은 그 공간에서 변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 앞일은 알 수가 없고 원하는 대로만 살 수도 없다. 나는 화장실에 가야 했고, 그래서 갔고, 일단은 해방감을 만끽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침 변을 보고 있는 그 순간, 청소시간이 시작된 거다. 화장실로 그날 청소를 맡은 다른 반의 아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할 수 없었다. 아, 신이시여. 처음으로 신이란 존재를 입에 담았던 것 같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내달렸다. 열려 있는 화장실의 문들 사이 굳건하게 닫혀 있는 화장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아, 빨리 나와. 청소하게.”

“뭐야, 안 나와?”

“야야! 나와라~!”



아이들은 짓궂다. 대개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이 없다. 혹은 알지만,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행동의 방향을 바꿀 수가 없다. 한 명이 문을 두들기기 시작하자, 다른 아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같이 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나오라고 난리가 났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섞여 들어 그것이 나를 더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일을 끝내고 급히 물을 내리는데 이게 또 물이 잘 안 내려간다.



아씨, 미치겠네.



이미 냄새는 감출 수 없었고 아이들은 코를 막았는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내가 있는 칸에서 조금 멀어졌다. 서러웠다. 그저 마려웠기에 마려운 일을 해결했을 뿐인데. 당장 학교를 그만둬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할 정도로 서럽고 창피하고 슬펐다. 겨우내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갔을 때, 아이들의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뻔뻔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오히려 턱을 들고 뭐, 왜? 하는 눈빛으로 그 표정을 되받아쳤다. 그렇게 승전한 개선장군처럼 기세 등등하게 화장실을 나와서 부리나케 반으로 돌아갔다. 내 교실로, 지금 당장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그 작은 책상으로 말이다.



막상 그 자리를 빠져나와 자리에 앉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뭘 했다고, 사람을 막 더러운 것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지,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때 심상치 않은 표정의 나를 누군가가 불렀다. 반 친구였다. 나는 뻔뻔함을 다시 한번 낯에 두르고 저 도깨비 같은 다른 녀석들이 똥도 못 싸게 괴롭혔다고 일러바친다. 지금 생각하면 12살 여자애가 잘도 그런 말을 친구한테 했구나, 싶은 게 아마 수치심과 서러움에 조금 분별력을 잃었을지 모르겠다.



놀라운 건 그 친구가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는 사실이다. 염라대왕이라 해도 믿을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당장 옆 반으로 쫓아가 나를 놀리고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그 화장실 청소 당번을 종이처럼 꾸깃꾸깃 구겨,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 친구의 그 격렬한 반응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염되었다. 그저 같은 반 친구가 수치를 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흥분했다.



그래, 왜 기르던 개도 내가 쥐어박는 건 괜찮지만 남이 하면 울컥 화가 나지 않는가. 어디 감히 내 개를?!! 나한테 도전하는 건가?! 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그렇게 반 친구들이 들고일어났다. 놀랍게도 화장실 청소를 하는 다른 반 아이들에게 가서 화장실에서 똥도 못 싸냐, 어떻게 그런 몰지각한 일을 할 수 있느냐(물론 몰지각이란 단어를 아이들이 썼을 리는 없다, 단지 내 기억에 그런 뉘앙스의 말이었다는 것이다), 싸움이 벌어졌다.


아, 그 순간 거짓말처럼 수치심이 사라졌다. 서러운 감정은 조금 남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때 그 친구와 반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회상할 때, 괴로움에 몸부림쳤을지 모른다. 나에겐 생애 첫 수치스러운 경험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전혀 모르던 때였으니까.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고선 알았다. 역시 수치심을 이기는 것은 분노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나 자신의 분노보다는 나를 위해 대신 내질러 주는 분노가 효과 제대로임을.



그 후 나는 놀랍게도 사과를 받았다. 똥 싸는 데 방해해서 미안하다. 다음부턴 너 같은 똥싸개가 맘껏 쌀 수 있게 청소 때 주의하겠다. 뭐 이런 개떡 같은 소리의 사과였지만, 나는 만족했다. 그들이 사과해서가 아니다. 나와 함께 분노해준 친구들의 행동이 보상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졸업 때까지 학교에선 절대, 절대로, 변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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