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_나만 창피한 거 아니죠?
나는 장르 소설 마니아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 수능을 앞두고는 이틀 만에 열 권도 독파하는 무시무시한 내공을 연마했다. 그중 첫 판타지 소설은 <비상하는 매>라는 비장한 제목의 책이었는데 현실을 뛰어넘는 그 자유로운 캐릭터들과 당장 무너져 내릴듯한 세계관 등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나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세계를 다룬 책들을 나는 참으로 좋아했다.
그 나름의 덕력을 현재도 유지하고 있다. 요즘은 카카오 페이지에 연재되는 웹 소설들에 푹 빠져서 온종일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는 날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목이 뻣뻣하게 서고 어깨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뻑뻑했다. 종종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까지 한다. 중증이다.
게다가 '하루 기다리면 1편이 무료'라는 일명 ‘기무’를 기다리려니 감질이 나서 대여권이고 소장권이고 야금야금 결제한 것이 통장 잔고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타격은 빠릿빠릿하게 일을 안 하는 것이었다. 어딜 감히 반백수 프리랜서 따위가 들어오는 일을 빠릿빠릿하게 하지 않는단 말인가. 미친 거 아냐?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을 다잡고 ‘기무’로 야금야금 버티며 마음을 달래는데 어느 날 지하철 안이었다. 기다리던 웹 소설 원작의 웹툰 ‘기무’가 떴다! 이미 완결성과 작품성, 팬층을 확보한 웹 소설을 웹툰으로 다시 연재하는 작품이었다. 남자 친구와 첫 키스를 할 때만큼 가슴이 설레었다. 페이지를 열고 스크롤을 올리며 집중하는데, 어머! 정사 장면이!
퍼뜩 지금 지하철 안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미 화면은 살색으로 가득하다. 그냥 봐도 신음인 의성어들이 빈 곳을 채우고 있다.
이럴 때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려서는 안 된다. 부모님 몰래 야한 동영상을 보려다 들킨 중학생처럼 굴 수는 없었다. 그러니 화들짝 홈버튼을 누르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고 달래 그 자리에서 웹툰을 다 보았다. 살색의 화면이 사라지자 마음은 진정되었지만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민망함을 달랬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는 해방감마저 들었다. 숨조차도 작게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리면서 크게 그간 모자랐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딱히 그렇게까지 민망할 건 또 뭔가. 내가 뭘 보고 있든 누가 신경 쓴다고 아니 신경 써봤자,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고.
아이고, 이 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