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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미 Oct 25. 2019

20년 후

커피 한 잔과 함께 읽는 글

커피 한 잔, 미래형 커피믹스는 어떤걸까?



20년 후에 나는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 아주 구체적이고 집요하게 답변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나는 생각보다 20년 후의 나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주 간단했다. 내가 지금 간절히 원하는 것과 심오하게 후회하는 것, 무겁게 걱정하고 있는 것들을 적당히 버무리면 되는 일이니까.



아마 나는 전업작가가 되었겠지. 10년 전 등단했고(아이고, 10년이나 걸렸네), 장편 소설 3편과 단편집 2권을 발표했다. 책은 잘 팔리기도 했고 전혀 팔리지 않기도 했지만 그래도 근근이 살아갈 정도는 되었다. 아니 전업작가이면서 여기저기 강의를 다녔고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으며 간혹 원데이 클래스를 열어 사람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수입으로 살아간다.



도심지 근교의 한적한 곳에 작은 주택을 전세나 월세로 빌려 생활한다. 집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으므로 중요한 건 집주인의 인성과 적당한 무관심이랄까. 투기나 세입자에게 받아내는 수입에는 관심이 없는 그저 관리하기 귀찮은 집 하나를 적당히 성실해 보이는 세입자에게 세놓고 그 집에 대해서는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집주인이어야 한다. 다행히도 나는 우여곡절 끝에 그런 집주인을 만났고, 낡았지만 큰 불편은 없는(아니, 그저 참아낼 수 있을 정도는 되는) 집에서 한적하게 살아간다.



아마 고양이는 한 마리를 함께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고양이도 노인이다. 검은색과 흰색의 얼룩덜룩한 무니를 가진 무엇보다 네 발의 흰 양말이 앙증맞은 고양이다. 그 외의 동거인은 없다. 부모님은 따로 살고 있고, 동생 부부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딸아이와 함께 복작거리며 사느라 바쁘다. 간간히 서로 안부는 묻지만 그 이상의 왕래는 없다. 부모님께는 종종 몸에 좋은 제철 생선이나 게, 직접 담근 술을 보내드린다. 뱀술만은 담그지 못한다. 여전히 파충류는 싫어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염수에 담가놓은 틀니를 꺼내 입에 문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치과에 잘 다녔어야 했는데. 오복 중 하나가 치아라는데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신경 쓰지 않았던걸 후회한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후회지만 곧 잊는다. 요즘 틀니는 꽤 좋아서 전혀 불편함이 없다. 치의학이 발달해 다행이라고 혀끝으로 틀니를 스윽 훑으며 생각한다.



저혈압은 여전하다. 나이가 들어 조금 높아졌나 싶었는데 다시 낮아졌다.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넘나들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 주에 해야 할 마감을 헤아리고, 마감 외에 소화해야 할 강의 스케줄을 확인한다. 아침엔 여전히 믹스커피를 마시며 안구운동을 한다. 시야가 더 좁아지고 안경을 써도 좀처럼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질 않는다. 안과도 꾸준히 드나들고 눈에 좋은 루테인이며 갖은 영양제를 쏟아붓는다. 노안은 점점 심해질 텐데, 이제와서는 라식도 할 수 없는데, 하루하루 눈을 뜨고 시야를 확인하는 게 두렵다. 어느 날 갑자기 희뿌연 윤곽 말고는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순간이 올까 봐.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어떻게 삶을 정리해야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오래된 노트북을 켠다. 1년 전 작성해 놓은 유서가 있으니 걱정을 접고 일에 몰입한다. 오늘따라 글이 잘 써지는 것 같다. 이러다 베스트셀러 내는 거 아냐?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런 내 뒷모습을 바라본다.



뭐가 됐든, 쓴 것의 반의 반이라도 이룰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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