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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쪼 Jan 20. 2023

7. 근데요 엄마, 저 꽤 괜찮은 사람이에요


# 가깝고도 먼 사이


나는 엄마를 불편해하는 딸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엄마가 계모가 아닐까, 어딘가에 진짜 엄마가 있지 않을까' 상상한 적도 있다. 어쩌다가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 모녀가 장난치고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어떻게 엄마랑 저렇게 지내지?'


경험해 본 적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혼 후 혼자 두 아이를 키워야 했기에 일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자녀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여가시간엔 거울을 보며 외모를 가꾸었고, 지인들을 만나러 나가서는 집에 안 오셨다. 엄마는 열심히 사셨지만, 관계에는 서툴렀다. 우리의 의견 같은 것은 궁금해하지 않았고, 남편복과 자식복 없는 불쌍한 팔자라며 자기 연민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여느 다정한 부모님들처럼 대했다. 그러다 화가 나면 자녀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곤 했다. 대화 자체를 하지 않는다거나 나머지 다른 한 명의 자녀에게 험담을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버릇을 고쳐주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으셨다.


그렇다고 엄마가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괴로웠다. 사랑해서 하는 행동들이 독이 되었다. 자신이 하는 행동들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사랑했던 만큼 분노는 커져갔다. 그리고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나는 엄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만 남게 되었다. 사랑했던 기억도, 분노도 사그라졌다. 마치 어릴 때 잠깐 친했던 친척을 만난 듯 어색한 관계지만 혈육으로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26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출가(?)하셨다. 어느 날부터 외박이 잦아고, 어떠한  없이 짐을 싸고 나가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남매는 초반에 몇 번 엄마의 안부를 물었지만, 어느 날부터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은 고요했지만 오빠와 내 마음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그 후 2년 뒤에는 내가 결혼을 했다. 친정아버지는 결혼식에 오신다고 약속하셨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결혼 후에도 어렵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싶었지만 좌절되거나 수치스러워지는 경험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 때문에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스스로 독립적이어서 그런 이라고만 생각했다.




 결혼 에도 종종 만났던 엄마는 나에게 가시나무였고 가까이 다가가면 찔리고 아팠다. 회복이 될 때쯤 다가가면 다시 찔렸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서서히 엄마와 나 사이의 적정 거리를 찾아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느슨한 거리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마침 우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나는 매번 다짐했다.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 엄마의 자격



아이는 그 자체로 완전했다. 여느 아이처럼 호기심이 많았고, 활발하고 건강했다. 그리고 엄마로서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에 지나치게 피곤하고 어려웠다. 출산 후 약 3년까지 '나 같은 사람이 엄마가 될 자격이 있나.'를 매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지쳤었다. 시부모님은 아이를 자주 보길 원하셨지만, 아이는 세돌이 되기 전까지 엄마아빠 없이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거부했다. 친정엄마에게는 아이를 맡길 만한 믿음이 없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기댈 곳이 없었다. 나무에 멋진 열매를 맺었는데 땅에 가뭄이 들어 뿌리가 썩어 들어갈 것 같은 위태함이 느껴졌다.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전업주부로 아이를 돌보았다. 잦은 우울감과 번아웃 증후군이 찾아왔다. 아이와 있을 때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경계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커온 환경이 아이에게 대물림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 아이에게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뉴스에서 보았던 아동학대 당한 피해자가 성인이 돼서 자신의 아이를 똑같이 학대하듯이,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을 지나치게 고려하고, 과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이가 만 3세가 되자 대화가 가능해졌다. 아이는 다행히 의사표현을 명확하게 하는 편이었다. 그 맘 때쯤 내가 취업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더 이상 나의 행동과 말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거라는 의심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서 그때를 생각해 보니 내가 왜 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처럼 스스로를 '못돼 처먹은 x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때마다 그것을 표현하면 나쁜 x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감정의 강도를 최대한 낮췄고, 덕분에 부정적인 감정도 덜 느껴졌지만 즐거움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매일 다이어리를 쓰면서 나를 칭찬해 줄 만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셀프 칭찬을 한다.

버스에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 예쁜 말 쓴 것, 피곤한 날에도 아이에게 최선을 다한 것, 아픈 와중에도 목표로 했던 일을 꼭 한 가지라도 해놓은 것. 등이다.


그러면서 느끼는 점은,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이의 평범한 엄마이지만 나는 우리 부모님과 달랐다. 더 이상 스스로를 옥죄지 않아도  충분히 양심적이고 건강했다. 더불어 엄마가 나에게 '못돼먹은 x '이라고 불러서 내가 그것을 오랫동안 믿고 살았듯이, 나는 우리 아이에게 '우리 보물이'라고 주문을 걸었다. 이제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아이에게 해주면서 나를 위로해 본다.




아이야,

너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우리는 네가 있어서 더 행복해.

우리의 아이가 되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재밌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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