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쪼 Sep 29. 2022

내가 변했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수치심을 다루는 방법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가 있었다. 동아리에서 만나 결혼 전까지 가장 가까웠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한동안 드물게 연락하고 지내다가 최근에 취미를 공유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함께 맥주 한잔하는 자리에서 그 친구가 신기한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요즘 약 먹어? 아니면, 마약 해?"



지켜보던 지인들이 모두 웃음이 터졌다. 평소에도 유쾌한 친구이기에 두서없는 엉뚱한 발언에도 웃음이 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며 눈을 동그랗고 뜨고 바라볼 때쯤 다시 질문이 이어진다.



"요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친구의 말에 따르면 '약 10년 전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나는 자주 우울하고 힘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은 밝아 보여 신기하다는 이야기였다.



"맞아. 그때 심리적으로 좀 힘들었어. 지금은 먹구름이 걷히니까 햇빛이 나는 기분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평소에는 순해 보이다가도 본인에게 버럭 화를 내곤 했었다고 한다. 그럴 때 무시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야길 들으니 '아차!' 싶었다. 상대 입장에선 충분히 기분이 상할만한 일이었다. 왜 버럭 화를 냈었는지 기억을 소환하기도 전에 친구의 말이 계속되었다.



"근데 너는 중간이 없는 거 같아. 너무 업되거나 너무 다운되거나."



 일부 맞는 말이었다. 과거의 나는 감정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시점부터 미안함보다는 불편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의 말이 맞다면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순간엔 그런 성숙한 판단이 들지 않았다.


이때부터 친구는 과거의 나 때문에 상처받았던 일, 나의 행동으로 본인이 부끄러웠던 일 등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굳이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었다. 가만히 있자니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 때문에 빨리 이 대화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네가 날 잘 모르는 거 같아."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중저음의 건조한 말투로 내뱉었다. 친구는 넉살 좋게 '맞아, 나는 잘 몰라.' 하며 쿨하게 마무리했다.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아서 웃으며 다른 주제로 넘어갔지만 젖은 옷 입고 나들이 나온 것 마냥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친구에게서 전혀 나쁜 의도가 보이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 왜


 다음날 문득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20대까지 치기 어리던 시절을 함께 보낸 동지였다. 그때 나는 그 친구에게 왜 화를 냈었을까? 그때의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아하.. 그랬었네.'


불현듯 떠오르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의 중심에는 한 가지 중요한 감정 포인트가 있었다. 바로 수치심이었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서 '수치심'을 검색해보았다.

수치심이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다. 거부되고, 조롱당하고, 노출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다는 고통스러운 정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굳이 드러내고 싶은 않은 부분이 그 친구에 의해 여러 사람에게 노출될 때 수치심을 느꼈다.

마치 어제의 일과도 일맥상통했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여러 사람 앞에서 과거의 내 단점이 드러났다.

삼십 대 중반이 된 지금은 불편한 감정이 드는 정도지만 10-20대의 나는 어땠을까?

어린 나는 버럭 화를 내고 난 후 마냥 그 친구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 친구는 전혀 나쁜 의도가 없었다. 상황에 대한 정리가 없이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오해가 생겼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객관적인 시선으로 정리가 되었다. 친구가 어제 이런 대화를 해준 덕분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날 저녁, 당장 전화를 했다.






# 덕분에



"일단 너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리둥절해하는 친구에게 차근차근히 설명을 이어갔다.

'내 잘못이 크다. 내가 버럭 화를 내서 네가 충분히 무시당했다고 느꼈을 것 같다.  왜 화가 났는지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미안하다. '

사과는 거울처럼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친구는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할 줄 몰랐다며, 되려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너희 부모님 왜 이혼하셨냐고 물어봤었어. 그래서 네가 화를 냈었잖아.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해."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친구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자신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 또한 이번을 계기로 내가 여러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덕분에' 자신에 대한 데이터가 생겼다. 


만약 어제와 같은 상황에서 예전의 나처럼 버럭 화를 내거나(저항), 친구와 관계를 멀리 했다면(회피)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수치심을 느낄 때마다 강하게 저항하거나 그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 피했을 것이다. 수치스러운 감정을 겪고, 직접 대면하면서 어떻게 다룰지 고민했던 이번 선택이 나에게도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오늘은 칭찬해주자! 잘했다 나!




작가의 이전글 왜 엄마만 설거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