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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타임 Dec 13. 2020

시간의 법칙속에서

인연의 무게

  

어느 순간이고 뉘엿거리며 지는 해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듯,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시간과 함께 모두 흘러가버린다.
난 요즘 그러한 시간의 법칙에 자주 기대어 산다.
진짜 싫은 일이 있었다. 시간의 법칙이  일도 끝을 내줄걸 알면서도 그 일을 할 때 만큼은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결말은 아득한 꿈속처럼 막연하게만 존재했다.
이 일이 끝나는 날이 온다면... 난 공중에 발이 뜰 것이라 상상했다. 마음이 깃털처럼 변해서 내 몸이 붕~떠다닐 거라고. 그땐 세상에 싫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그 일을 하는 동안 어떤 일이든 내게 백 프로 즐거움을 줄 순 없었다.

그런 일이 드디어 끝이 났다. 그런데 그 끝을 맞은 내 마음의 상태가 내게 충격이었다. 감정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었다. 머리가 그 일에서 해방이라고 내게 아무리 얘길 해줘도 내 마음 상태는 여전히 밝지가 않았다. 하기 싫고 괴로워하던 그때의 마음에 내 감정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난 그 일의 끝을 선언하는 시간의 경계를 두고 싶어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다.



12월의 제주도는 섬 전체가 크리스마스 같았다.
가는 곳마다 크고 소담스레 나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귤열매들은 크리스마스트리 오너먼트처럼 온 거리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노란 전구 대신 귤이라면, 빨간 전구 대신 먼나무 열매가 흐드러진다.
그리곤 질세라 동백이다.
겨울인데 마법처럼 나무들마다 푸른 잎들이 가득이다. 그 종류를 다 알 수 없이 다양한 식생에 눈을 어디다 둘지 모를 때마다 억새가 펼쳐졌다.
그럼 난 또 그곳이 시키는 대로 차분해져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곤 했다.

여행지의 조용한 풍경을 찾아 걸으며 난 지난 인연들을 떠올리곤 한다. 생각의  습관 같은 것이다.
지난날의 어떤 인연들은 예쁜 구슬처럼 알알이 마음에 박혀있었고 , 어떤 인연들은 누렇게 바랜 폐지 뭉치처럼 구겨진 채로  담겨있었다.
그렇게 매 시절 매 순간 놓지 못하고 붙잡아둔 인연들이 머릿속 구석 창고에 빼곡히 쌓여 있다가,
여행지에서 일상과 거리를 두고 걷게 되면 어김없이 내 의식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풍경이 내 시선을 끄는 대로 발걸음을 하는 동안 머릿속에 그 어떤 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인연들이 미울 것도 아쉬울 것도 좋을 것도 없이 그저 머리가  텅 빈 채로 다녔다.
철새도래지인 성산읍 오조리 마을, 박수기정을 멀리 두고 바라보며 작물들이 자라고 있는 안덕면 대평리 마을...
어떻게 내가 이렇게 예쁜 길을 걸으며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있는 건지..

난 종종 생각했다. 겹겹이 쌓인 이 인연들이 내 노년의 무게를 더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풍경 속을 걷는 내 발걸음 그게 아님을 알려줬다.
이미 그 인연들은 제때에 왔다가 사라졌고, 그 흔적조차도 세월의 풍화를 겪고 있다고.

나의 지난 인연들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발걸음 가볍다. 더욱이 걷는다. 구석구석 걷다가 성산일출봉을 코앞까지 두고 멈췄다.

오길 잘했다.

돌아가면 귀찮다고 미뤄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야겠다.

이젠 여행 끝 다짐들도 소박해졌다.


아 무엇보다 난 하기 싫은 그 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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