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ver. 내 짝꿍)
늘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더딘 나였다.
고3 새 학기를 시작하던 첫 주.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아이와 짝이 됐다.
성격이 어떤지, 친구가 누군지, 공부는 잘하는지, 가족은 몇인지... 가뜩이나 힘든 새 학기가 더 힘들겠다 싶었던 어느 날의 야간 자율학습시간,
짝꿍이 내게 노래를 불러줬다.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저 역시 내가 낯설기는 마찬가지였을텐데 기대 없이 노래를 불러달라 던진 요청에 아무렇지 않게 불러주던 노래.
처음엔 그런 짝이 신기하여, 나중에는 짝이 불러주는 저 노래가 좋아서 난 틈만 나면 불러달라 귀찮게 했고,
내 짝은 수학 문제를 풀면서도, 소설책을 보다가도, 어떤 날은 내 등을 토닥이며 저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줬는데...
가사와 곡조가 제목만큼 쓸쓸했는데도
읊조리듯 낮게 부르는 짝꿍의 노래에 마음도 어느새 토닥여졌다.
생각해보면 새 학기 증후군에 시달리던 내 마음을 오히려 더 슬프게 했던 노래였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노래를 듣는 짧은 시간 동안은 슬픔의 이유가 달라졌다는 게 마음에 쉴 틈을 줬다.
지금은 짝 이름도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저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는 날이면 다시 나의 감정은 고3 3월로 돌아가 선명히 떠오르는 짝의 얼굴과 마주한다.
콧잔등의 옅은 주근깨가 아기같이 새하얀 피부에 예쁘게 어울렸다.
가지런한 앞머리와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이 야무지게 묶은 머리, 큰 키, 심지어 보온 도시락통에서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먹던 모습까지.
양희은의 노래에 누가 토를 달까마는, 담백하고 나지막이 부르던 짝꿍의 목소리가 떠오르면 어느덧 양희은의 목소리는 시시해진다.
세월이 이만큼 흐르도록 내가 여전할 줄 그땐 몰랐다.
바뀌는 환경마다 마음이 골골하며, 남들 아무렇지 않을 때 또 적응을 해내기까지 그 마음의 어두운 날씨들을 고스란히 견뎌내는 과정.
어떤 일은 다행스럽게 짧았고, 어떤 일은 알 수도 없이 길었다.
짝꿍의 노래를 들으며 그 시간만 지나면 우린 강인한 어른이 될 줄 알고 그 작은 노랫소리에도 기대어져 지낼 수가 있었는데...,
공중에 숫한 시간들을 다 태워버린 것처럼 난 여전히 강인함을 갖지 못했다.
짝꿍의 노래도 더 이상 없고, 이젠 그 노래 하나로 채워질 만큼 간단한 모양새도 아닌 내 마음.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지라 했건만 때론 깊은 만큼 사무치고, 넓은 만큼 휘청거린다.
몇 해 전 장마는 폭우로 날 괴롭히더니 올해 장마는 머문 건지 지나간 건지 알 수조차 없다.
올여름은 구름이 장관이다.
초봄이나 늦은 가을에나 어울릴 것 같은
저 노래가 우연히 들리자, 뜨거운 여름도 금세 쓸쓸해진다.
지나간 옛사랑 대신 짝꿍이 떠오르니 내겐 더 슬픈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