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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타임 Jul 14. 2022

신발과 생채기

신발 하나.


걷는데 또각또각 낯선 소리가 난다.

오랜만이다. 구두굽이 닳아서 나는 소리.

예전엔 자주도 갈았는데 그러고 보니 구두굽을 간지가 십 년이 더 된 것 같다.

내가 그때보다 더 좋은 구두를 신나보다, 나도 모르는 좋지 않은 걸음걸이가 고쳐졌나 보다 생각하는 순간,

아... 운동화 신게 된 지 십 년쯤 됐지...ㅎㅎ;;


신발 둘.


매해 생일에  하이힐을 선물해 주던 친구가 어느 해 운동화를 선물로 줬다.

굽이 적당히 높고, 징이 가득 박힌 운동화.

난 "야~" 하며 웃었고, 친구는 "왜!" 하며 웃었다.


그렇게 평생 신지 않던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운동화를 신고부터 산책을 좋아하게 됐다.

운동화를 신고부터 등산도 몇 번 갔다.

운동화를 신고 여행 가서는 하루 만보도 이만보도 잘도 걸어 다녔다.


신발 셋.


구두수선가게.

1평 안 되는 그곳에 엉덩이 붙일 작은 의자.

초여름 이른 퇴근길 구두를 맡기고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도시.

비가 오기 시작한다. 흙냄새가 올라온다. 후드득 소리가 점점 커진다.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진다.

낮의 색과 밤의 색이 공존하는 시간, 오렌지빛 커튼 색 세상.

아늑한 기분. 나 혼자 안전하다.

아저씨가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구두굽을 갈아줬음 좋겠다.

"아저씨, 이쁘게 잘해주세요." 괜히 한소리 더 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 구두수선가게를 본지가 한참이다.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구두수선가게였는데 굽 하나 고치자고 백화점까지 다녀야 하는 게 번거롭다,

나의 여름 풍경 하나가 사라진듯하여 서운하다.




신발 넷.


무엇이 잘못된 건지 난 못 신는 신발 투성이다.

발꿈치를 끈이 감싸주는 슬링백 구두를 처음 신은 어느 날.

갑자기 발꿈치와 아킬레스건에 심한 통증이 왔다. 두 걸음 더 딛자 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

롱스커트 정장 차림을 하고는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 댄다.

후드득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에라 다행이다. 차리리 홉스텝으로 걸을까, 신발까지 벗어던질 만큼 비를 좋아하는 여자 정도로는 봐주겠지... 싫어하는 비가 다행인 날이었다.



신발 다섯.


그래서 내가 신는 신발의 디자인과 브랜드는 거의 비슷하다. 계절이 바뀌고 오랜만에 난 다른 종류의 신발이 신고 싶어졌다.

비싼 신발 버릴까봐 디자인은 고수했고 브랜드만 바꿔보기로 했다.

그러자... 여지없이 양쪽 뒤꿈치 근처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파여 깊은 생채기를 낸다.

그 후 이틀 두꺼운 밴드를 몇 겹씩 붙이고도 다리를 쩔뚝대고, 몸은 후끈거렸다.

삼일째.

혹시나 밴드를 제거하자 얇은 피부가 새로 올라와 상처부위를 덮고 있었다.

살면서 신체의 재생능력이 주는 신비와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난 이 별일 아닌 광경이 경이롭다.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듯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러고 나면 새 신발을 신어도 더 이상 발이 아프지 않다는 것.  늘 그랬듯이.

내 발이 새 신발에 맞춰 자신의 모양을 새롭게 조각했다.


그리고 여섯째 신발.


내 앞에서 한 여자애가 나오는 눈물을 애써 감추려 든다. 자주 그렇다. 어린것이 눈물이 나면 그냥 으앙 울어버리면 될 텐데 안 우는 척을 하려 더 힘들다.

난 제 뜻대로 모른 척 대한다. 빨갛게 된 내 발의 생채기. 우리 마음에도 재생능력이 있다. 살면서 상처를 어디 한두 번 받겠는가...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다쳐 울고 또 울고 감추고 또 감추느라 힘들겠지만... 내 발의 생채기가 낫고 있듯 대부분 마음의 상처들도 저절로 치유될 것이다.

우리의 모습이 내가 단언할 수 있는 이유이다. 상처받은 대로 다 간직하고 살았다면 우린 지금 이렇게 밝은 모습일순 없을 테니...

우린 대부분 그것들을 훌훌 털어버렸단 뜻이다.


생채기를 겪은 내 발은 새 신발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눈물을 감추는 아이는 또 세상을 받아들일 힘을 얻는다.

헤어질 땐 웃으며 나가는 아이를 보고 내발은 3일이 걸렸는데 너의 마음은 고작 30분이길 바래본다.

알 수가 없지... 마음이 어떤 모양으로 조각이 되었을지... 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야 자란다. 그래야 살아진다.






굽이 닳은 신발은 구두수선가게를 찾을 때까지 고이 신발장에 넣어 두기로 했고, 난 다시 원래의 걸음걸이를 찾았다.

이제야 볼수록 신발이 예쁘다.

오늘만큼은 더욱 당당하게 걸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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