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앞

by 피카타임

제주도에 휴대폰 거치대를 두고 왔다. 실리콘 재질로 된 별것 아닌 구조의 그 거치대를 10년째 매일 만족하며 쓰고 있었는데, 두고 왔다.
같은 제품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고, 그 멀쩡한 녀석이 주인을 잃고 버려져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고되었다.

이게 문제다. 오래된 물건들은. 한낱 실리콘 공산품 따위, 한낱 냄비 따위, 한낱 옷가지 따위인데..

난 말도 안 되는 감정이 휘몰아치기 전에 얼른 생각과 미련을 차단해 버렸다.

오늘까지 쉬었다. 여행을 다녀왔고, 책을 두 권 정도 읽었고, 영화를 한 편 보았다. 낮에는 강변을 달려 동생에게 다녀왔다. 내비게이션을 보지 않고 소리로만 달렸더니 풍경은 더 잘 보였고,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에 듣던 오디오는 볼륨이 작아졌다 커졌다 산만했다.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오늘 읽은 부분은 날 계속 생각 속에 묶어둔다.
뱅골 호랑이와 망망대해를 떠다니게 된 파이.

그 아이가 그 환경에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어떤 날은 바쁘다고 했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 그리고 밤의 반복되는 스케줄을 들려줬다.
최악의 상황에서 파이는 '일상을 영위'함으로써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일상의 의미와 그 고됨이 주는 힘. 약간의 충격이 느껴진다.

그리고... 순순히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일상에 끌려들어 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소가 되어야지. 멍에를 메어도 반항하지 않고 논밭으로 걸어가는.
아사셀의 염소가 되어야지. 사람들의 죄를 지고 무인의 광야에 버려져도 묵묵히 걸어가는.

돌아오는 길 해가 길어진다.

사실... 얕은 마음은 비장하고 깊은 마음은 울상이었다. 출근하기 싫다고 더 놀고 싶다고 엉엉 떼를 쓰고 싶다. 여전히 뽀로로였다. 마음은 산방산 아래 차가운 겨울 주차장을 아직도 뱅뱅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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