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발밑

by 피카타임

돌이켜보면 가난인데, 가난인 줄 전혀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 첫해, 우린 한동안 큰 방 하나에 여섯 식구가 함께 잠을 잤다. 다행히 방만한 거실이 따로 있었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그 방과 거실이 내 기억만큼 '큰' 것일지는 자신할 수 없다.

어린 나에게 방의 개수나 집의 형태, 혹은 소유 방식이 가난의 척도가 되지는 않았다. 그 집에서 난 즐거운 날이 많았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날마다 맛있었고, 내 도시락은 자랑스러웠다. 길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우연히 엄마를 만나는 일도 그랬다.
아빠가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어도, 부모가 다툰다거나 가끔 뒷집 남자애처럼 아빠에게 매를 맞는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동생은 귀여웠고, 우리 셋 중 가장 작고 아픈 오빠는 온 가족이 보호해줘야 하는 여리고 소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혹여 엄마를 동생에게 빼앗겨 버린대도, 절대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나만 사랑할 외할머니가 늘 함께 있는 집.

"우리 집은 미국이야." 난 친구들에게 종종 그런 말을 했다.
동생에게는 엄마와 내가, 외할머니에게는 나와 동생이, 아빠는 술을 잔뜩 마시고 면도를 하지 않은 날에만 나와 동생에게, 나에게는 외할머니와 동생이, 엄마에게는 동생이, 오빠에게는 아빠를 제외한 모두가.
우리는 매일 열심히 뽀뽀를 주고받았다. 그러니 방 하나에 온 가족이 모여 밤을 보내며 살았는데도 그게 가난인 줄 알 길이 없었다.

잠자리의 모습은 늘 같았다. 일종의 질서였다. 이불을 펴고 개었던 모습이나 덮었던 이불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바닥에 넓게 깔던 이불의 재질과 문양은 또렷하다. 그 이불은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각자의 자리를 나눠줬고, 매일 밤 우리는 저마다 이불을 방 삼아 정해진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큰 방'이 모두의 공간이자 각자의 공간이 되는 시간, 내가 방 삼은 자리는 외할머니의 발밑이었다.
종종 난 의미도 없는 불평을 했지만, 식구들 옆에 나란히 자다가도 한밤중이면 슬그머니 외할머니 발밑으로 파고들었다. 그 자리의 온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뜨끈한 아랫목, 애착 인형 대신 꼭 붙들고 자던 파삭한 할머니의 두 발.
건조하고 얇은 그 두 발을 잠들 때까지 주물렀다. 할머니는 간지러움을 타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다 커서야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한참 클 때까지 발을 주무르고 젖가슴을 깨물어댔는데도 할머니는 한 번도 간지럽다며 나를 뿌리친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은 내게 '부요'였다. '부요'는 사람이 살면서 느끼기 쉽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건 부자도,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다.
그 집은 내게 떠올릴 거리를 잔뜩 안겨줬다. 그 추억들은 아주 세세하다. 작은 물건 하나, 스쳐 간 말투 하나, 대화와 웃음 하나, 해가 뜨고 지던 온도와 날씨 하나까지도.
그리고 그건 지금의 나를 이루는 전부 같다.
그 시절의 세세함들이 내 피를 타고 흘러, 뼈와 살과 근육과 세포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느낌이다.

요즘도 길에서 어린아이를 보면 그런 생각에 잠긴다. 저 아이의 지금도 가난을 모르는 시간일까. 충만한 '부요'를 느끼는 인생의 유일한 시간을 지금 살고 있는 걸까.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할머니와 시장에 나와 있다. 두부를 사려는 할머니 주변을 아이는 장난치듯 자꾸만 맴을 돈다. 할머니 몰래 아이에게 싱긋 미소를 보냈다.
무엇을 지불하고도 살 수 없는 지금 너의 시간을 완벽하게 보내고 있길.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너의 평생을 살게 할 귀한 양분을 얻길.
그래서 넌 이겨낼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이렇듯 난, 비록 미소뿐이지만 진심을 가득 담아 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을 자주 응원한다.




일요일 연재
이전 03화교복과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