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과 아빠

by 피카타임

얼마 전 아빠의 낡은 옷장에서 발견한 건 우리들의 중학교 교복이었다. 최근에 빨아 가지런히 정리된 교복.
이제 와서 왜. 아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인연에 푹 빠져 살던 시절, 내게 가장 큰 보물은 사람들과 오래도록 주고받았던 편지 박스였다. 누군가가 얼핏 본다면 시답잖은 폐지 같은 것이었을까. 조금만 관심을 두고 살펴본다면 그건 진귀했다.
그 모든 메리 크리스마스와, 방학, 우정과 사랑, 이별 그리고 성장, 추억이고 인생의 자취이자 상장 같은 것.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시작으로 삶의 구간 구간 감사한 스승님, 친구들, 산타, 연애 상대, 타임캡슐까지.
어느 날 아빠는 그것들을 죄다 내다 버렸다. 많은 책들과 함께.

아빠에게 그것들에 대한 무슨 권리가 있었을까. 그날 밤 분노와 슬픔으로 범벅이 된 눈물을 흘리며 재활용 쓰레기장을 헤맸고 몇 권의 책을 다시 주워왔다. 그러나 편지 박스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 일은 대화 없이 몇 마디 고성만 오간 채 끝이 났다. 내 마음에 가해진 지독한 폭력이었다.
아빠가 빨아둔 교복을 보자 잊고 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원망과 회한과 함께 슬픈 감정이 밀려든다. 아빠가 변했다.

살아오는 동안 아빠를 보면 마음속으로 늘 같은 말을 했다.
'나도 힘들어요.' 적당한 때가 되면 아빠 때문에 힘들었던 모든 마음을 다 보여주고 아빠를 아프고 후회하게 만들 거라 자주 다짐했다.
그런데 내가 오랜 세월을 들여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어느덧 전쟁이 끝나버렸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계획 없이 상대가 항복해 버렸고, 상대가 겪어온 전쟁도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나 역시 지난 세월들에게 무장 해제를 선언했다.
딸이 아빠 앞에서 푼수가 된다는 건, 남이 지겹거나 말거나 아빠 따라 같은 스토리를 무한 반복한다는 건,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증거였다.

아빠는 새로운 방법으로 삶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매번 놀라움을 안겨줬다. 어느 날은 핸드폰 속 우리들 사진을 인화해 액자를 만들었다. 다른 날은 여행지에서 가져온 기념품 인형을 정성스레 벽에 걸어뒀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시즌, 아빠가 직접 철사를 꼬아 만든 빨강 초록의 리스 장식은 기야 나를 통곡하게 했다.
전쟁을 종식시킨 아빠는 이렇게 그 무엇으로도 대적할 수 없는 '아기자기함'이라는 강력한 신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지난 명절.
차례로 방문하는 양가의 풍경이 비슷하다. 자잘하고 맥락 없는 가재도구들이 정리가 안 된 듯, 그러나 나름의 정리가 된 채 여기저기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입술까지 튀어나온 쓴소리를 겨우 삼켰다.
"이거 좀 다 버리세요. 한 번 쓰고는 버리세요. 이건 무슨 필요로 가지고 있는 건가요. 그냥 새로 사세요, 어차피 낡아 못 쓰게 될 일은 없어요."
이런 풍경들은 미관상의 문제나 소용의 문제보다도 부모님들이 젊었을 때는 절대 연출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기분이 더 좋지가 않다. 젊은 시절 그분들 성격에 가당키나 한 모습들인가. 부모님들의 신체 노화를 대면할 때보다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러니 만류하는 목소리는 매번 커졌다.

저 자잘한 잡동사니들이 사라진다면 부모님의 정신과 마음이 다시 젊어질 것처럼 처음에는 쓴소리도 잔소리도 열심히 해댔지만, 효과는 항상 그날 하루뿐이었다.
마지못해 버리다가도 다음번에 방문하면 그대로 있었고, 새 물건을 사다 채우고 오면 새것 옆에 헌 것도 그대로 있었다.
그날도 한껏 잔소리를 쏟아내려 찌푸린 미간과 함께 복식 호흡으로 들숨을 넣고 뿜어내려는 순간,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나는 피할 수 있을까? 내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래전으로 내 마음을 돌려보았다. 지금과 그때의 내 마음과 생각은 다른 게 무척이나 많았다.
그렇다면 미래의 나도 별수 없단 얘기다. 분명 변할 테니까.

잔소리 대신 내 미래의 예고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탐탁지 않다. 크게 구미가 당기는 예고편은 아니지만 자꾸 미리 봐두고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화분이 얼까 봐 둘둘 감아 둔 촌스러운 담요에 시선이 머문다.
그러고 보니 이건 뭐 하러 들고 있냐는 나의 질문에 '그냥'이라는 대답은 한 번도 없었다. 이유들이 언제나 있었다.
버리기가 아까워서, 누가 준 거라서 혹은 이전 누구 거라서, 튼튼해서, 편해서, 물이 튀어서, 딱 맞아서, 때론 예뻐서.
그곳에 그것들이 있는 사연과 이유들이 하나씩 귓가에 살아났다. 내 중학교 교복에는 어떤 이유를 붙여뒀을까?
당신들께서 그 잡동사니들에게 부여해 준 의미들을 생각하니... 잔소리는 나의 월권이다. 그 옛날 편지 박스를 내다 버린 아빠처럼.
그분들과 비슷할 게 분명한 내 미래를 막을 수는 없겠지. 그러니 최대한 습관에 의존해 살도록 매일같이 미리미리 내다 버려야겠다.
당분간 청소 열풍이 불겠다. 마침 다음 명절도 얼마 남지 않았고.
구석구석 생각지 못한 물건들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또 상념에 젖어들지 알 수 없을 일이다. 뒤집어쓰는 먼지만큼 울다 웃다 할 것 같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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