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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pr 09. 2023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나의 성별을.

 “여자애가 이 시간에 어디를 나가?! 여자는 밤에 나가면 안 돼!”


  수업이 끝나자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는 편의점에 가겠다며 나를 따라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는 순간, 할머니의 호통이 떨어진 것이다. 시간은 밤 9시. 밤이긴 했지만 집 앞 가게에 못 갈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꾸짖음에 놀란 아이는 신발을 신다 말고 멀뚱히 서 있었다. 80대의 할머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닌지라, 같이 편의점에 들른 후 아이를 아파트 건물 입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씀드렸다. 내 말에 할머니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할머니의 말씀은 나에게도 편치 않았다. 할머니의 말뜻을 알면서도 ‘여자’를 강조하신 것에 괜히 반문하고 싶었다. 물론 80대의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는 안다. 아마도 이미자 노래인 ‘여자의 일생’과 같은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30년대생인 할머니의 인생이다. 2010년대생인 아이가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난 불편했고, 그 말이 내 세대를 거쳐 어린아이에게도 여전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눈부시게 발전했음에도 ‘여자는 밤에 나가면 안 된다’는 말은 몇십 년 전의 상태 그대로였다.


   아이는 편의점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이가 고른 과자 몇 가지를 사 주고 집으로 바래다주면서 이야기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네가 어리니까 밤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 근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가 밤에 외출해도 안전해야 하는 게 맞거든. 할머니는 옛날을 사셨던 분이고, 할머니의 경험을 생각하면 할머니의 말씀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 그렇지만 여자가 밤에 다니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야. 선생님 말, 이해되지?”


   아이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 나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아이와 내가 타고난 성별이 부정된 듯하여 속상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날 때 내 성별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것은 나의 행동과 삶을 많은 부분에서 규정지었고, 할머니의 말씀은 그것의 단면이었다.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일상에서 소소히, 그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편의가 거세된 모습. 그리고 그 비합리적인 불편함을 개인이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시선들. 우리의 세상이 여전히 그러하기에 할머니의 말씀은 나를 더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내가 열 살이 넘도록 친할머니가 식사 때마다 ‘유나가 남자 동생을 보게 해 달라’며 기도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남동생을 얻기 위한 방법이라며 나에게 입히라고 고모가 엄마에게 건넨 사촌오빠의 속옷도, ‘여자애가 안경이 뭐냐’며 나와 어머니를 타박하던 할머니의 말도 기억한다. 물론 내 할머니 또한 시대의 억압을 통해 그것이 진리라 강요받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여성인 내 성별, 아니 여자로 태어난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했던 경험으로 아직 마음에 새겨져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든 여자든,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밤길을 안전히 걸을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주어(主語)에 ‘여자는’, 혹은 ‘남자는’이 등장하는 문장이 더 이상 힘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성별과 상관없이 일상에서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길 꿈꾼다. 여자아이가 늦은 밤에도 동네 편의점에 걱정 없이 갈 수 있는 것,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나는 나의 세상을 꽤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 것 같다.      



                           

                                                                                               에세이문학 23년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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