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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ug 05. 2023

늦여름, 그 평화롭던 제천의 밤공기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천에 영화제가 있어서 1박 2일로 갈까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


 친구 J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제천에서 열리는 영화제가 있다는 걸 몰랐던 나는 무슨 영화제냐고 물었고, 그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라고 알려줬다. 영화와 음악이 공존하는 이름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나의 취향에 딱 맞는 이름에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했고, 친구는 곧장 숙소와 입장권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도권 대규모 아파트촌에서 평생을 살다시피 한 나에게 제천의 첫인상은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소도시였다. 영화제가 열리는 제천 도심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안에 모든 곳을 걸어서 구경할 수 있을 듯했고, 집 앞 왕복 6차선 도로에 익숙한 나로선 제천의 작은 도로들이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개막작 <장고>를 보는 것으로 영화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제천문화회관과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제천 메가박스를 오가며, <댄싱 베토벤>, <기억된 시간 : 빌 에반스>, <디바 엘라 피츠제럴드>를 보기 위해 부지런히 자리를 옮겼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고뇌하고 흔들리면서도 자신이 꿈꾸는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그 모습은 참 고귀해 보였다.



    여러 상영관을 오가는 사이 스쳤던 제천의 시장 풍경도 참 정겨웠다. 시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린넨 블라우스가 얼마든지 걸려있었고, 자수가 예쁘게 놓인 파우치와 침샘을 자극하는 먹을거리들도 많이 있었다. 영화를 마음껏 보기 위해 찾은 제천이었지만, 제천 중앙시장과 동문전통시장 구경도 즐거웠다. 재래시장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더 익숙한 나에게 제천의 시장들은 참 반가웠다. 그렇게 J와 제천에서 보냈던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왜냐하면 몇 년 만에 맞이하는 완전한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시기에 친구의 제안은 그 자체로 참 고마운 것이었다. 나는 당시에 어두운 터널에서 막 벗어난 참이었다. 뇌종양 환자였던 엄마를 몇 년간 간병하고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지 2년을 조금 넘긴 나에게는 일상에서 잠시 떠나 마음을 환기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엄마의 투병기간 동안 나는 온종일 엄마를 돌보았다. 개두술(開頭術)을 받은 엄마는 갓 퇴원했을 때만 해도 혼자서 집안 정도는 그럭저럭 걸어다니는 듯하더니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가 진행될수록 다리에 힘을 잃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집 밖은커녕, 이불 밖도 혼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청소도, 요리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엄마는 말했다. 자신을 수발드는 딸에게 미안했던지, 엄마는 나 몰래 혼자서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매번 넘어졌고, 바닥에 넘어진 상태로 내 이름을 불렀다. 미안하고 멋쩍은 목소리로. 그러니 나는 엄마로부터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J는 그런 나를 주말마다 불러내어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줬다. 그 덕분에 나는 미로 같은 시간을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내 곁을 떠난 후 텅 빈 집을 마주하며 마음 앓이 중이었을 때 J가 제천여행을 제안한 것이다.



   우리는 1박 2일 동안 여러 영화를 보았고, 관람했던 작품들은 모두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제천이 내게 남긴 건 ‘영화제’ 이상의 추억이었다. 극장 맞은편 분식집에서 J와 먹었던 떡볶이, 제천의 시장들, 그리고 귀엽고 익살맞은 그림이 벽마다 그려져 있던 교동 민화마을도, 민화마을 입구에 있던 해바라기 모양의 커다란 도로반사경도 빠뜨릴 수 없다. 해바라기 반사경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속 반사경에는 신난 표정의 나도, 민화마을의 정겨운 풍경도 모두 담겨있다. 그 사진은 오랫동안 내 SNS의 프로필 사진 자리를 지켰다.



    내 방엔 더블베이스를 짊어진 채 자전거로 흙길을 달리는 이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다. 바로 J와 다녀왔던 제13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포스터이다. 영화제 중 한밤에 방문했던 기념품 매장에는 포스터가 이미 매진이었다. 내가 무척 아쉬워하자, 매장 벽에 붙여두었던 포스터라도 괜찮겠냐며, 직원이 조심스럽게 떼어서 건네주었던 바로 그것이다. 그 포스터 속, 사내의 낭만적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다시 J와 제천에 가고 싶다고 말이다. 지난 여행은 J의 도움으로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J와 내가 함께 보낸 지난 30년의 세월에 감사하고, 함께 맞이할 앞날을 격려하는 시간이 되길 꿈꾼다. 가을이 머지않았음이 느껴졌던 그날의 제천 여름밤 공기가 그립다.           





한국국토정보공사 사보, <땅과 사람들> 2023년 8,9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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