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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Jul 28. 2023

내 뜻대로 그러나 올바르게

'자유의지', 보석과 같은.  


성당에서 성서공부 봉사를 할 때마다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와 뱀을 굳이 만들어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였는가' 하는 내용이다. 그룹원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선악과마저 따 먹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라고 답을 하는데, 사실 내가 잘 이해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 그저 그리 전한 것뿐이었다. 




   자유의지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하게 된 것은 가르치는 대학생들이 내게 조언이나 상담을 청하면서부터이다. 학생들이 나에게 털어놓는 고민은 주로 가족 같은 가까운 사이의 것이 많았다. 그들 주변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때면 ‘너는 피해자이고, 어서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빠르게 해결방안을 주고 싶었지만, 나는 한 박자 숨을 골랐다. 그들의 부모나 형제를 타인인 내가 간단히 평가하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이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내 진심이 그에게 닿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의 걸음에 맞춰서 함께 걷고 웃고, 때론 함께 우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것인데, 나는 '라포'라고 말하는 것 보다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서로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성인이 되어 처음 만난 학문이 인류학이어서 그런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인류학자가 몇 년이고 한 마을에 머물면서 진행하는 '현지조사'와 비슷하단 생각을 한다. 인류학자가 마을의 면면을 파악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마을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는 작업을 통해 '연구자'이면서도 결국엔 '마을구성원'의 하나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이란 세계에 다가갈 때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사람의 삶에는 몇십 년의 시간과 그만큼 겹겹이 쌓인 환경들, 그리고 여러 ‘자유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종교에 대해 무례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내 종교를 앞뒤 맥락도 없이 폄훼하고 자신의 종교를 내게 강요했다. 그들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종교를 갖게 됐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상대의 자유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 며칠 전 미사에서 신부님이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며, 만약 우리를 자신 뜻에 무조건 따르게 한다면 그건 우리를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 장난감같이 여기는 것'이라는 말이 그래서 두고두고 머리에 남는다.




   다시 창세기 봉사를 한다면, 모두의 마음에 소중하게 존재하는, 그러나 늘 성찰하면서 사용해야 하는 '자유의지'에 대해 조금은 확신을 갖고 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주신 절대자마저도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자유의지가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 올바름을 향해서 삶을 내 뜻대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건 참 놀랍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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