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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Nov 19. 2023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우리 집에서 서현역으로 가는 길가에는, 지난 늦여름 '서현역 사고'로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꽃과 메시지가 놓여 있는 공간이 있다. 사건 직후 생긴 그 추모의 공간을 보면서, 만약에 시간이 흐른 언젠가  그 흔적이 없어진다면 뭔가 쓸쓸할 것 같다는 걱정을 미리 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사회에는 아직 아픈 기억을 품고 피해자를 위로할만한 깜냥이 없음을 역시 확인하게 되겠다는 염려랄까. 그래서 몇 달이 지나도록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그 공간을 보면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마음 한 귀퉁이가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무척 가까운 친척 중에, 친지 장례식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엄마 장례식도, 큰고모부의 장례식에도, 그 외의 다른 사람들 장례식에도 안 왔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친할머니 장례식 때 그 사람들이 온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그 사람은 미신을 심각하게 맹신하고 있는데 그 망자가 얼마나 가까운 핏줄인가와 상관없이 아마도 장례식장에 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들에게 화가 미친다고 여기는 듯했다. 할머니 장례식에서 만난 그들에게 무슨 생각으로 내 엄마 장례식장에 안 왔냐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지만, 내 부모뻘인 그들은 내 눈치만 볼 뿐 나에게 한마디도 못했다. 우리 엄마는 자신의 장례식에 온 조문객에게 화를 줄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대로 장례식장에 안 온 덕분에 뭔지 알 수 없는 화를 그들은 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고 그들은 친족들 사이에서 이른바 '손절'을 당했다. 나도 너도,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는 그 거대한 진리를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못 본 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게까지 해서 그들이 얻고 싶었던 것은 뭐였을까. 자신들이 다른 이의 죽음을 부정한다면 결국엔 그들의 죽음도 부정당할 수 있다는 통찰을 그래, 그들은 할 수 있는 능력이 애초에 없었다. 사람은 자기의 수준으로 세상을 보기 마련이다.




내가 걸을 때마다 찍히는 발자국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미 찍어둔 무수한 발자국 위에 찍힌다. 그리고 내 발자국 위에는 훗날 다른 이들의 무수한 발자국이 찍힐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로마 격언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건 다시 말하면 죽음이 오늘은 너에게, 그리고 내일은 나에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나의 최종 도달점이 죽음이라는 명벽한 사실은 오히려 위로로 느껴진다. 삶의 과정, 그 소중함과 의미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가 되니까.



그래서 나는 통공이라는 가톨릭의 개념이랄까 교리가 참 좋다. 죽은 이든 살아있는 이든, 우리는 모두 하나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 죽음은 피조물이라면 당연히 맞이해야 하며, 주님 안에서 피조물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건 오히려 기쁨과 희망, 자유일 수도 있다는 것.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겠다는 그 마음처럼.



서현역으로 향하는 길, 그 추모의 공간이 아주 오래오래 남아있길 소망한다. 그 공간은 위로와 사랑의 공간이자,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공간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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