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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Nov 23. 2023

고도모 미루요

이귀복의 수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가 보다. 5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다니. 그러나 이건 정말 우연이었다.

  

두어 해 전부터 우리 집에는 일본문화가 들이닥쳤다. 녹음기에서는 종일 일본어가 흘러나오고 ‘아라시’라는 아이돌들이 반복해서 불러대는 일본노래에 발목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밤이 되면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여인의 교태스러운 목소리가 목덜미에 착착 감겨든다. 이른바 왜색문화에 집을 몽땅 내주고 만 것이다. 처음엔 무언가 거북하고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일본에 건너가서 학업을 계속하려는 딸아이를 격려하는 의미에서라도 내가 빨리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 뜻도 모르는 일본 곡조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아이가 빠져있는 드라마에도 조금씩 눈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 어미를 위해 아이는 화면 아랫단에 한글 자막이 보이도록 배려해 주었다. 소소한 일상에 시선을 맞춘 일본드라마는 내 정서에 맞았을 뿐 아니라, 간혹 배우들의 입을 통해 내가 무심코 쓰고 있는 일본말까지 들을 수 있었으니 드라마 보는 일이 점점 흥미로웠다. 하긴 내가 자란 곳이 일본과 거리가 가까운 경상남도가 아닌가. 거기다가 일본시대에 교육을 받은 부모님은 평소 대화를 나눌 때도 일본어를 많이 섞어서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억양만은 꽤 친숙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드라마 속의 여배우가 재빠른 말로 무어라 떠드는데 유독 ‘고도모’라는 한 단어가 내 귀에 꽂혔다. 나는 화면을 놓칠세라 급하게 한글자막부터 읽었다. 자막에는 ‘아이들’이라는 글자가 언뜻 지나가고 있었다. ‘고도모’라는 말은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였다.



   어렸을 때 ‘고도모’라는 그 말의 뜻이 참으로 궁금했다. 그러나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떤 비밀스러운 냄새 때문에 나는 엄마에게 그 말만은 끝내 묻지 못했다. ‘고도모’라는 말 다음에 으레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루요’라는 말이었다. 고도모가 ‘아이’를 뜻하는 말이라면, 미루요는 대체 무슨 뜻일까. 오랜 세월 동굴 속에 숨겨놓은 비밀상자의 끈을 바투 쥐었을 때처럼 야릇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낮에는 엄마를 ‘밥상 차려주는 사람’ 쯤으로 알던 아버지도 밤이 되면 한사코 엄마 옆자리에 누웠다. 감나무의 빈 가지에 둥지를 튼 겨울바람이 온갖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우물가에 놓아둔 함석두레박은 바람에 밀려 마당을 굴러다니던 추운 겨울밤이었다. 방마다 불을 지필 수 없었던 엄마는 안방크기와 맞먹을만한 큰 솜이불아래 어린 자식들을 가로로 몇 놈, 세로로 몇 놈 숨겨놓고는 남폿불을 껐다. 엄마가 자리에 눕고 조금 지나면 낮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구애였다. 아버지는 한껏 낮춘 목소리였지만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도 아버지의 그 음성만 들으면 나는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달빛이 유난히 환한 밤이면 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욱 은근해졌지만 엄마는 그런 아버지에게 이상하게도 냉정했다. 그 뿐 아니라 그때마다 아버지를 향해 단호하게 내뱉는 말이 있었다.


  “고도모 미루요!”


토라진 아버지가 이불을 거칠게 감고 돌아눕는 기척이 나면, 나는 엄마가 조금 전에 뱉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곤 했다. 엄마 말에서 느껴지던 뉘앙스로 미루어본다면, 밤에만 친한 척하며 지분거리는 아버지가 싫어서 “왜 이래요?” 하고 톡 쏘아붙이는 정도로 짐작되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런 냄새를 풍기던 그 말의 실체를 더는 알지 못한 채 나는 기억의 동굴 속에 그 말을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말의 의미를 수정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고도모가 ‘아이’를 뜻하는 말이라면, 지금까지 나는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미루요’는 무슨 뜻일까. ‘고도모’의 뜻을 알기까지는 50년이 걸렸지만 ‘미루요’의 뜻을 아는 데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내 질문을 받은 딸아이는 눈을 빛내면서 되물었다.


   “'미루요'는 일본말로 ‘보다’라는 뜻인데, 자기주장이 강하게 들어있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엄마가 그 말을 어떻게 알아요?”


   50년 동안 자욱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겨울 밤, 엄마가 아버지를 향해 던진 그 말의 뜻이 단순히 ‘왜 그래요?’ 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도모 미루요 = 아이가 봐요


엄마는 그때 이불 속에 누워있던 어린 자식들을 의식했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들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아버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젊은 엄마는 아버지의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어쩌자고 애벌레 같은 새끼들을 품은 채 긴 겨울동안 ‘고도모 미루요’만 연발했던 것일까.



   부부 사이의 행복이란 정신의 소통과 함께 몸의 소통도 중요하다. 소통하지 못한 응어리가 결국 우리 부모로 하여 그렇게 불화하게 만든 것일까. 결코 우리 탓은 아니지만 지금의 마음을 굳이 말한다면 안방에서 함께 뒹굴었던 우리들에게도 그 원인이 있는 것 같아 민망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밤마다 ‘고도모 미루요’를 외쳤던 부모님의 부부생활이 차라리 인간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또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다. 방마다 뜨뜻하게 데워놓고 벌집처럼 제 영역에 들어앉아 겨울을 보내고 있는 우리 집만 하더라도 ‘고도모 미루요’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부부간의 낭만은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이를 따라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 고대문학인 만요슈의 한 구절이라도 스스로 해득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이젠 그 목표를 바꾸어도 좋겠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엄마와 아버지가 잠자리에서 토닥거리며 나누던 그 많은 언어들, 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그 은밀한 기호를 해득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워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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