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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Nov 20. 2023

봉식이의 딸기

 이귀복의 수필

봉식이가 싸리비로 마당을 쓸고 있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우체국의 뒤뜰과 우리 가족이 거처하는 관사의 넓은 마당을 흙이 패이도록 쓸고 있다. 나는 방에 앉아 봉식이의 비질소리를 듣고 있다. 내 귀는 비질소리를 쫓느라 밖으로 나간 지 오래고, 눈은 펼쳐놓은 영어책을 건성으로 쫓고 있다. 느슨해진 내 눈길을 피해 영어책의 문장들이 알파벳 조각들로 해체되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S P R I N G I S H E R E !


 봄이 왔다. 봉식이가 비질하는 마당에도 내 영어책 위에도 노란 봄이 부챗살처럼 퍼지고 있다. 봉식이가 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 나는 몰랐다. 타고난 소아마비인지 어릴 때 사고로 다쳤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봉식이의 자전거 타는 실력을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이 허약한 그였지만 전보 배달원을 구하는 아버지 눈에 봉식이보다 더 나은 적임자는 없었다. 봉식이는 자전거만 잘 타는 게 아니라 부지런하고 성격도 밝은 소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나보다 봉식이는 서너 살 위였지만, 우리는 매일 한 식구처럼 어울리며 지냈다.


 내가 학교에 가고 없는 낮에는 봉식이 혼자 전보 배달을 다녔지만, 저녁에는 내가 함께 가기를 바랐다. 나도 봉식이의 자전거를 얻어 타는 일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전보지 봉투를 든 그가 고염나무 밑에 세워둔 자전거를 빼내면서 “복아” 하고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마당에서 나를 부르는 봉식이의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하던 숙제를 밀어놓고 개가 물어뜯은 플라스틱 슬리퍼를 찾아 신었다.


 그가 자전거를 아무리 잘 탄다고 해도 살이 찌기 시작하는 내가 뒷자리에 올라앉으면 자전거 바퀴가 놀란 듯 잠시 출렁했다. 나는 그것이 조금 부끄러웠지만 모르는 척 했다. 봉식이는 페달을 밟기 전에 꼭 “내 허리 꽉 잡아” 하고 소리쳤다. 나는 봉식이의 가는 허리를 꽉 잡았다. 나를 태운 봉식이는 신나게 휘파람을 불며 논두렁을 지나 솔숲이 있는 이웃 마을로 갔다.


  봉식이와 함께 하는 전보배달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이웃 남학생과는 말만 해도 눈에 불을 켜던 엄마였지만, 내가 봉식이의 전보배달에 따라나서는 일에는 무심했다. 다만 봉식이의 부실한 다리가 못미더웠던지 신작로를 지날 때 자동차와 부딪힐까봐 그것만 걱정했다. 하긴 다리를 심하게 저는, 초등학교도 못 나온 우체국 급사와 명색이 국장 딸인 내가 좋아지낸다는 것은 엄마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봉식이의 자전거에 올라 노을이 깔린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는 일은 사춘기에 접어든 나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 날이면 봉식이는 내게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느냐 묻기도 했고, 영어를 좀 가르쳐줄 수 있느냐는 말도 했다. 나는 그런 봉식이가 당당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어느 여름밤이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군부대로 급히 전보 배달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일반전보라면 다음 날 아침에 배달해도 되었지만, 속달전보일 경우에는 한밤이라도 달려가야 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군부대로 배달해야 하는 것이라 지체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밤길을 나서는 봉식이에게 손전등을 쥐어 주었다.

봉식이와 나는 냇물만 건너면 되는 지름길을 택하기로 했다. 밤에는 군부대 근처를 얼씬거리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이 얼핏 떠올랐지만 봉식이와 함께 하니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냇가에 이르자 봉식이는 자전거에서 내려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나를 태운 자전거 핸들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냇물 속으로 들어갔다. 비교적 얕았지만 폭이 넓은 시내였다. 달빛을 받은 물살들이 절룩거리는 봉식이의 종아리를 휘감으며 한참동안 장난을 치다 흘러갔다. 미안해진 내가 자전거에서 내리겠다고 했지만 봉식이는 발이 젖으니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자전거에 앉았다고는 해도 봉식이가 물살을 가르느라 애쓰는 동안 물이 튀어 내 스커트도 거의 젖어버렸다.


그렇게 냇물을 다 건넜을 때였다. 둔치에 이르자 총을 든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군복을 입은 남자는 봉식이에게 총부리를 겨누더니 다짜고짜 암호를 대라고 소리쳤다. 그날의 암호를 알 리 없는 봉식이었지만 “부대에 전보배달 하러 왔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봉식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보초병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전보배달 하러 오는 놈이 여자를 태우고 다녀? 뒤에 탄 여자 내려!”


 졸지에 ‘여자’가 되어버린 나는 어떻게 자전거에서 내렸는지 기억도 없다. 이번에는 보초병이 봉식이의 등 뒤에 숨어서 떨고 있는 내게로 다가오더니 계속 암호를 대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순간 내 눈에는 보초병이 들고 있는 커다란 총의 실루엣만 보일 뿐, 냇물 흘러가는 소리조차 들렸다 안 들렸다 했다. 봉식이의 허리춤을 움켜잡고 떨고 있는 내 손이 풀리는가 싶었는데 나는 그만 봉식이 발치에 주저앉고 말았다.


혼미한 의식 사이로 봉식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온 여자애는 애인이 아니라 우체국장의 딸인데 전보배달 하는 길에 따라왔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봉식이의 애인이 아니라는 말에 화가 풀렸는지, 보초병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음부터 전보배달 올 때는 여자는 태우고 오지 마."


한마디 뱉고는 봉식이가 내민 전보 봉투를 낚아채듯 받았다. 그리고는 우리를 한 번 째려보더니 막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조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냇가에 앉았다. 봉식이가 모래밭에 삐뚜름하게 세워놓은 자전거도 놀랐는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 숨을 돌린 봉식이가 혼잣말로 연신 ‘미친 놈, 미친 놈.’ 중얼거렸다. 자전거를 끌며 절룩절룩 걸어가는 봉식이 뒤를 나는 몇 발짝 떨어져서 걸었다. 숲을 지날 때 개똥벌레들이 꽁무니에 푸른 불을 달고 눈앞에서 동그라미를 그렸지만 하나도 잡고 싶지 않았다. 무언지 모르게 참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나는 봉식이의 전보배달에 따라가지 않았다. 봉식이 역시 고염나무 아래에서 ‘복아’ 하고 부르는 일도 없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우리는 싸운 사람들처럼 서로 눈길을 피했다. 엄마가 국수를 말아놓고 “봉식아, 와서 국수 한 그릇 묵어라.” 불러도 전에처럼 마루에 오르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그 보초병의 말대로 되었다.


 다음 해 초여름이었다. 마침 휴일이라 봉식이는 혼자서 빈 우체국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식구들이 없는 틈을 타서 우물가 옆에 숨어 은밀한 서답을 빨았다. 그러나 그 서답을 널어야 할 곳이 마땅찮았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는 바지랑대가 세워진 빨랫줄이 있었지만 봉식이 그 녀석이 내다볼까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궁리 끝에 볕이 들진 않지만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두란의 감나무가지에다 그것을 널기로 했다. 마치 무엇을 훔치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다 널고 보니 꼭 마을 어귀 당산나무 가지에서 펄럭이던 한지조각들 같아서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빨래를 거기다 널면 마르냐?”


 봉식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난 숙직실 창문에 붙어 서서 내가 하는 양을 죄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 놀랐다. 일 년 전 보초병을 만났던 그때보다 더 놀랐다. 그가 미웠다. 수치심에 대야도 감나무 밑에 팽개쳐놓고 방으로 달려와 얼굴을 묻고 울었다. 그리고 그날 봉식이가 냇가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말을 그대로 따라해 버렸다. 미친 놈, 미친 놈.


 어느 날 뒤란을 돌다가 내가 서답을 널던 그 감나무 밑에 흰 꽃 몇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딸기꽃이었다. 꽃들 사이로 익지 않은 몇 개의 딸기가 보였다. 그것이 익으면 혼자 따먹을 생각에 풋딸기를 나뭇잎으로 살짝 가려놓았다. 연두색 딸기가 주홍빛으로 익기를 기다리는  초여름의 하루하루는 비밀스럽고도 행복했다.

햇빛이 조금씩 뜨거워지던 날이었다.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다가 무심코 고개를 드는 순간 뒤란을 돌아 나오던 봉식이와 딱 눈이 마주쳤다. 한 손에 싸리 빗자루를 든 봉식이가 조심스럽게 오므린 다른 한 손을 내게 내밀었다. 빨갛게 익은 딸기가 봉식이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숨겨 놓은 내 딸기를 봉식이가 먼저 따버린 것이었다. 약이 오른 나는 봉식이의 오므린 손을 뒤집어 딸기를 몽땅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혼자서 그 딸기를 먹어버렸다. 그때의 딸기 맛을, 나이 먹어버린 지금의 내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흐르는 물에 딸기를 씻는다. 물기를 머금은 선홍색이 농염하다 못해 섬찟하다. 문득 적장의 머리를 들고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유디트. 그녀의 붉은 입술이 떠오른다. 세상도 변했고 나도 변했고, 딸기 맛도 변해버렸다.


 참, 봉식이는 그 해 여름 장티푸스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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