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유나 Dec 14. 2023

무관심

이귀복의 수필

낯선 남자 하나가 욕실에서 면도를 하고 있다. 그것도 런닝셔츠 바람으로. 그의 얼굴에 생크림 같은 거품이 하얗게 묻어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얼굴을 진지하게 탐색하는가 싶더니 이내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가며 면도날을 움직인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그의 옆모습을 정신없이 훔쳐보고 있다. 아찔하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느낌 하나가 송곳처럼 꽂히는가했더니 찌르르 등줄기를 훑는다. 나는 거울 속의 남자와 눈이 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황망히 시선을 피한다. 예순의 여자에게 기이한 감정을 가져다 준 낯선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일찍이 나는 남편의 면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니다. 남편에겐 턱수염 같은 건 아예 없는 줄 알았다. 삼십 년이 넘도록 익숙하게 보아온 것은 한 번도 보지 않았는 것과 맥이 통하는 이 아이러니.

남편이 비누로 빈약한 거품을 내어 면도를 해온 그 긴 시간동안 나는 그에게 면도용 거품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여자와 아내의 성(性)이 다르듯 남자와 남편의 성(性)도 다르다. 처음엔 분명 여자와 남자로 만나 얼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성은 서서히 휘발되어 중성이 되는가 싶더니 결국 무성(無性)의 경지에 이른다. 이 기막힌 시간의 풍화작용. 해탈이 따로 없다.

그렇게 살아온 내게 남편의 면도하는 모습은 단순히 터럭을 깎는 무심한 일상이었을 뿐, 특별하게 각인되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랬던 남편이 면도를 하고 있다. 뺨과 턱에 잔뜩 거품을 바른 채 거울 앞에 붙어 선 그의 모습이 너무나 생경하다. 오늘따라 면도기를 쥔 그의 팔에 근육이 꿈틀거린다.

이것은 모두 딸아이 때문이다. 방학을 맞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비의 선물로 챙겨온 면도용 거품. 그것이 화근이었다.



육십 먹은 여자의 등줄기를 훑어버린, 화석이 된 줄로만 알았던 슬픈 부끄러움.

아, 남편도 남자였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봉식이의 딸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