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몸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면

여성의 몸은 역사적으로 이 사회에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by moonbow

자신의 몸을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또 느낄 수 있는 것만큼 축복이 없을 것이다.

그저 건강과 활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찰하고 사고하는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사회에서의 여성의 몸은 희생을 위해 존재했던 긴 역사가 있다.

긴 조선 시대의 억압적인 여성역사가 그 흐름을 같이 한다.

조선시대에는 분명히 머리카락 한 올도 부모가 물려주신 거라는 ‘효’ 사상 아래 머리를 자르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이와 모순되는 논리가 존재했는데 여성의 자해의 역사의 하이라이트는 우리가 그리고 존경해 마지 않는 정조임금 때 가장 심했다고 한다.


요즘은 잘 쓰지도 않는 욕이긴 하지만 ‘화냥년’이라는 천박한 욕은 ‘환향녀’에서 유래되었다.

임진왜란이 후, 정유재란 후 볼모로 잡혀가고 또 인질로 잡혀간 수많은 여성들은 고향에 돌아오지만

이미 ‘몸이 더럽혀진’ 존재로 고향땅에서 다시 살아갈 수 없었다.

‘몸을 함부로 굴린다, 창녀다’라는 의미로 환향녀는 ‘화냥년’으로 그 단어가 전락한다.

그 단어의 생성과 욕으로써의 자리매김의 수많은 나날동안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죽음과 수모와 고초가 뒤따랐을까 생각해보면 한숨이 나온다. 굳이 우리나라에 여자 귀신이나 처녀귀신이야기가 많은 이유를 헤아려보지 않아도 짐작하고도 남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왕조는 대를 이어가기도 힘들었지만 여러가지 사회 변화도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졌다.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열녀났네.’ 라는 말의 ‘열녀’는 임진왜란이후 방향성이 참으로 바뀌어 버린다.

남편을 잃은 과부의 재가가 힘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되면 살길이 막막해졌던 여성들은 스스로 열녀가 되어

열녀비를 받는 것만이 국가에서 나오는 , 요즘으로 치면 최소 생계비라도 받게 되어 먹고 살 수가 있었던 거다.


관아에 보고되던 열녀에 대한 보고는 영조 재위 당시 매우 늘어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왠만한 강도(?) 가지고는 열녀비를 받을 수 없어 점점 엽기적으로 신체를 훼손하는 보고가 많아졌다. 이는 정조 임금 때 가장 최고의 수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사연역시 엽기적이다. 시아비가 아파 고기가 없어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내어 고깃국을 끓여줬다든지,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자결을 하는 여성의 수도 많아진다.


자신의 신체를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소중히 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은 여성에게만 빗겨나간 것처럼 보인다.


과부를 미망인이라고 불렀던 연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여성의 생명은 오로지 남성에게 복속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남편이 죽으면 같이 죽어야 하나 ‘아직 죽지 못 한 자’라는 시한부 인생을 생사람을 잡는 데 쓰였으니 말이다.


정조임금 당시 열녀가 되지 못하고 또 미망인으로 밖에 살 수 없는 사연을 적어 마음을 토로한 기록이 책으로 적혀 남아 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여성의 생명이 무언가, 허망하기만 하다. 자결에 실패한 사연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연이 많았다 하니 자살에 실패한 이유와 변론을 ㅡ목숨걸고라도 써야 모진 생을 이어나갈 수 있었나보다. 한편으로는 수학의 정석처럼 모범적으로 열녀가 되고 그 방법이 참혹하고 고통스러울 수록 남은 가족에게 열녀비하사로 인한 쌀을 많이 남길 수 있었던 모범 열녀의 이야기가 책으로 편찬되기까지 하였으니 엽기적이다 못해 모순적이고 끔찍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위 내용은 <조선의 열녀전>책에서 본 내용의 기억을 더듬어 작성되었습니다. 추후 인용을 명확하고 자세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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