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봄을 그리며

by moonbow

버스에 몸을 싣고 집에 내려왔다. 내려오는 중에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실컷 봤다. 나무는 아직 나뭇잎을 입지 못하고 신경증의 증상처럼 보이는 가지들을 이리저리 뻗고 있었다. 버스에 몸을 싣기 전에는 수업시간에 철학자 김용옥 선생의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에 대한 걱정 반 격려반의 이야기를 들었다. 앞날이 암담한 이 학생들이 없으면 세상은 어두워지리라는 이상한 격려글이었다.


집에 내려와 이웃에 계신 신부님을 뵈었다. 음악극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오히려 하고 있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신 신부님이었는데.... 하다 보면 뭐가 재미있고 그러냐고 물으셨다. 나는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가사쓰는게 재미있지만 아직은 어렵고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재미를 느낄 단계가 아닌 것 같다, 찾고 있는 중 이다라는 그런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 내가 답답하셨는지 파다보면 광맥이 나올 것 같냐는 느낌이 드냐고 되풀이 해서 물으셨다.


마른 수건을 짜는 느낌. 내가 만든 인물의 노래를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나’라고. 그래서 그 속에 빠져서 연기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미친 듯이 이야기하고 노래할 수 있는 미친 열정이 있냐고 되풀이해서 물으셨다.

"네, 있습니다!“


이런 패기 있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뒤엉키고 억눌린 목소리가 입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나또한 모르겠다. 앞 날이 암담하여 그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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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나는 왜 음악극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미쳐서 바로 그 삶을 사는 것처럼 울부짖고, 유혹하고 갈등하고 미치고 또 노래하고 할 수 있는가? 내 가슴 속엔 무엇이 있어서 이렇게 흰 종이 앞에 앉아있고 밤이면 입을 꼭 다문 채 말할 수 없는 단어를 이빨 사이에 끼워 물고 잠을 자고 왜 여기까지 내가 왔는가? 왜? 일 년에 백 만원도 못 버는 예술가가 수도 없이 많다고 하는데 그런 모든 것을 이기고 목숨을 걸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구렁텅이. 늪에 빠져버린 느낌이 든다. 대중성을 가진 작품을 내가 써낼 수 있을까.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지금 헤매고 있는 걸까.

답답함과 거북함으로 몸을 이끌고 산책을 갔다. 나약한 마음에 눈물이 조금 났다. 죽든지 쓰든지.

‘글을 쓰되 누구보다 나을 거야. 누구에게 인정받아야 돼. 돈을 벌어야 돼.’

이런 생각에 갇혀 쓰지 않고 그저 쓰고 싶다. 근데 그게 참 안 된다. 거친 분노와 욕구불만으로 나는 고통스러웠다. 페이스 북에 글을 써도 좋아요 몇 개 댓글 몇 개에 신경을 쓴다. 얄팍한 마음이다. 누군가 찬양해주지 않아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내가 쓸 것을 쓰겠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고 싶은 글을 쓰겠다. 두 개의 마음이 교차해서 엉키고 있었다.

빈 가지 사이로 바람이 분다. 바람엔 봄의 노래가 있다고 느낀다.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의 소리는 겨울을 닮았지만 바람의 냄새는 봄이다. 길 가에는 눈이 쌓여 있다. 눈의 감촉은 부드럽다. 물이 흐르고 있고 물기가 있는 눈은 사박사박하다. 멀쩡한 길을 놔두고 나는 눈 위를 걷는다. 그 소리와 발에 닿는 느낌. 힘들지만 힘들게 느끼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아직 세상모르는 백구 설설이가 나를 따라온다. 나를 따라온다. 나를 따라오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 아니듯 그는 물도 마시고 바람에 춤추는 낙엽도 잡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는 봄을 알리러 온 하얀 나비를 보고 그를 따른다. 설설이의 몸짓과 나비의 움직임이 아직 녹지 않은 눈과 거친 나무 사이로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나무들을 배경으로 한편의 시가 되었다.

설설이는 낙엽이 무언지 알 것인가? 낙엽이 무언지 알고 그를 잡아 입에 물었으면 득이 될 것을 알고 배가 불러 행복한가? 한 낯 날아오르는 나비의 움직임을 쫓는 그는 나비가 실은 자신의 입맛에는 맞지도 않고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까? 그를 알고 쫓으면 그는 더 똑똑한 개인가? 그는 그저 날아오르는 낙엽을 물어보려 몸짓하고 세상에 나온 나비를 궁금해 하며 뛰어다닌다. 그 뿐이다. 정말로 그 뿐이다. 그 몸짓이 사뭇 텅 비어 보이고 그의 순백색 몸과 함께 아름답다.

내가 뒤늦게 다시 공부를 하는 것도, 뭔가가 되겠다고 울며불며 또 때론 저항하고 밀어내며 있는 것도 설설이의 몸짓에 다름 아닐 수 있다고 느낀다. 이야기의 효용이나 그 광맥을 모른다고 해도 세상이 주는 낙엽, 나비(나에겐 이야기)를 좇아 살아가면 그것 자체가 세상에 화답하는 나의 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뭔가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재미있을 수도 괴로울 수도 있다.

그저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나비를 놓고 그 움직임에 따라 춤을 춘다. 왈츠를 추다 탱고를 추다......... 기본이 없고 불분명한 춤이라 욕을 먹어도, 비웃음을 당해도 그저 추면된다. 내 온몸과 온 마음으로 추었다면 성공도 경제적인 것도 상관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설설이가 낙엽이 필요한 것이다, 필요 없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춤을 추듯 나도 춤을 추고 싶다. 그렇게 설설이의 몸짓이 나에게는 지금 절실하고 오롯한 희망이며 위안이다. 그렇게 걸어가고 싶다. 아직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춤을 췄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 춰보는 것이다. 광맥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쓰는 것이다. 설령 죽을 때까지 그 광맥에 가 닿지 못하더라도.


설설이가 나를 보고 웃는 듯하다. 날보고 따라오라며 뒤를 돌아보고 꼬리를 흔든다. 신이 인간을 보낼 때 불안하여 같이 보낸 것이 ‘개’라는 말이 있다. 말없이 생각 없이 그들은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나무들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질퍽질퍽 발소리가 난다. 산은 북쪽으로부터 붉고 노란 물을 들였고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을 다 몸에서 버렸다. 나뭇잎을 버리지 않으면 겨울을 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버리고 나야 봄이 온다. 거친 나무껍질 사이에서 놀랍도록 연하고 야들야들한 잎이 나올 준비를 한다. 길가에 지난여름 태풍에 쓰러졌던 고목 사이로 새 가지가 나왔다.


봄의 바람이 나를 애무한다. 조금 있으면 분홍 빛 여린 꽃잎이 나올 것이다. 어둡고 투박하고 두꺼운 나무껍질 속에서. 해사한 봄의 미소가 다가오고 있음을 바람 속에서 느낀다. 봄바람처럼, 설설이가 나비를 잡는 몸짓처럼, 그의 꼬리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마음 속 언 얼음이 녹아 발이 푹 빠질 웅덩이를 파놓는 글을 쓰고 싶다. 땅은 온통 질척거린다. 걷기도 힘들고 신발도 더러워졌다. 그리고 한 문장이 내 가슴 속에서 떠오른다. 아, 봄은 원래 질척거림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음악극창작과에 들어오고 나서 2번째 학기에 집에 내려갔다 쓴 노트를 적어봤다.

그 때 나와 함께 같이 산책을 했던 백구 설설이는 지난 여름 뜨거운 열기를 못 이기고

무지개다리너머로 떠났다.

나비를 쫓아 춤추듯 뛰던 설설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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