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것
한 쪽만이 절대 만들 수 없는 것
-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것
명절이다.
어디까지가 누구의 역할인가 갑론을박하고, SNS와 뉴스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명절은 오랜 관습에 따라 지키는 좋은 시절이라는데 즐거이 명절을 맞이하는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받는 자들이 더 많아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그런 명절을 맞아 오늘은 꽤나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해보려 한다.
젠더 이퀄리티(Gender Equality) 그리고 페미니즘(Feminism).
동서양, 남녀노소 막론하고 모두가 집중하는 이야기.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어느 한 이슈가 도마 위에 오르면 너도 나도 물어뜯고 가루로 만들기 바쁘다. 그 공격성과 속도감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정주행한 '킹덤'에 나온 인육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코리안 좀비 같다. 나는 분야를 막론하고 일상에서 불편함을 많이 느끼는 프로 예민러로서, 서로 물어 뜯고 있는 그 모습들 조차 너무 불편했다. 불과 몇 년 전, 지인이 내게 '너는 페미니스트냐?'라고 묻는 말에 '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무지에서 나온 대답이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하대하는 여성우월주의자를 의미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무지한 시점에 개인 블로그에 국내 여자 배우가 여자 배우로서의 삶의 힘든 점과 본인의 극복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을 응원하는 글을 쓰면서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라는 말을 썼던 과거가 있다(지금은 그 문장을 삭제했다).
몇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할 망정'류의 말을 자주 들었던 사춘기 학창시절엔 남녀공학 교실 안에서 내게 생리대를 빌려주는 친구가 미드에서 마약을 숨기 듯 품 안에 넣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야 생리가 더럽냐? 우리가 죄졌어? 왜 숨겨가?"라고 모두가 들으라는 의미로 소리치면서 손에 다 보이게 들고 가다가 '쟨 또라이다'라는 뒷담화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보다 더 어린 아이일 때는 할아버지 댁에 친척일가가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엄마와 작은 엄마만 따로 작은 상에서 밥 먹는 모습이 매우 이해가 안됐고, 나도 똑같이 로보트 만화 좋아하는데 멋진 디자인에 불빛까지 나오던 남아용 운동화에 비해 실내화에 핑크색 줄 하나 그어진 여아용 운동화가 너무 볼품 없어서 불공평하다고 가게 앞에서 땡깡을 부린 적도 있었다.
사소한 것부터 떠올려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는데,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유치원을 다니던 아가시절부터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던 일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던 불평등함이었다. 그렇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분야에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지했다. 젠더 이퀄리즘이 빠른 속도로 대중에게 이슈화가 되면서 그 흐름 안에서 개념의 혼란도 겪었다.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이런 생각을 혼자 하고 있진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안에 있다. 작게는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운영을 좌우하는 정치에 행사하는 투표권까지 이제는 적어도 어떤 포인트에서 불편함을 느껴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예민한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닌 방향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 커뮤니티 활동은 전혀 하고 있지 않다. 가입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대신 "쟤는 왜 저렇게 예민하고 불편해 해?"라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도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에 힘을 내고 있다. 예를 들면, #metoo 가 농담으로 소비되는 걸 목격하면 정중하게 지적한다. 성별을 떠나 잘못된 여성성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자리에서도 논리적으로 그게 잘못되었음을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지적만 할 것이 아니라 성별과 세대가 연대하여 세상을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을 나눈다. 직책과 권력이 무서워 차마 그 순간에 목소리를 내지 못함을 반성하고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고 공부한다.
2년 전 P&G사의 캠페인 광고가 좋아서 SNS에 공유한 적이 있다(같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여자 연예인이 포르노를 떠올리게 하는 시점에서 광고를 찍었다). 앞서 고정된 성인의 관념과 대비되게 Run like a girl이 run faster as you can으로 이해했다는 꼬마 여자아이의 말로 끝나는 걸 보며, like a boy도 나오려나 했는데. 2년 새 또 많은 것이 변했다. 변곡점들이 이루는 협주곡처럼 같은 회사에서 이번엔 Best men can be를 내어왔다. 더 이상 칭찬이랍시고 어머님이 누구냐며 엉덩이를 만지지도, 넌 남자니까 울면 안된다고도 하지 않고 서로를 공격이 아닌 위하는 마음을 쓰는 게 당연한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공격과 방어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소비되는 에너지가 상당하고, 그 장 안에 들어갈 경우는 이루 더 말할 수 없다.
사실 아직도 '한국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페미니스트냐고 묻는다면 여성우월주의 색을 띄는 특정 한 커뮤니티 사람들로 오해 받을까봐 걱정되는 마음에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을 어려워 한다. 번역의 과정에서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혐오'라는 단어가 혐오스럽게 들리고 더 공격적으로 부추기는 것 같긴 하다만, 세상을 바꾸는 과도기 속에서 왜 그렇게 격하게 공격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누군가가 답 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쟁하지 않으면 인종차별처럼 당연하게 여기던 관습을 깨부수지 못한다는 것. 그 어느 편에 속해있더라도 모두가 동의할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한 쪽만이 절대 만들 수 없다.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 2014년 P&G 광고 #LikeAGirl
▼2019년 P&G 광고 The Best Men Can 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