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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a kim Feb 21. 2019

수학의 정석을 샀다.

정답이 있다는 쾌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김변태

수학의 정석을 샀다.

- 정답이 있다는 쾌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김변태




약 한 달 전, 업계 전환 이직에 성공했다. 항암 약물의 regimen을 계획에 따라 준비하고, 용량을 계산하고, 이상반응이 없는지 확인하고 기록하던 병원의 업무를 그만둔 지 만 3개월을 채우고 난 후였다. 탈임상 탈병원 퇴사는 업계 전환을 해보겠다고 던진 출사표였고, 별 거 없는 나의 포트폴리오를 긁어모아서 작고 큰 문을 두드려봤던 3개월이었다. 문을 열고 반쯤 몸이 들어가 봤던 곳도 있었고, '저-기-요'라고 외쳐도 답이 없던 곳도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이 옅어지고, 20대에 찾아왔어야 할 치기 어린 행동이 이제야 찾아온 것인가 헷갈리던 3개월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소중한 기회가 타이밍 좋게 다가왔고, 난 그렇게 업계 전환 이직에 골인했다.


사실 업계 전환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원하는 분야를 제한 두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일해보지 않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운영이 기획이자 전략인 것 같고, 전략과 기획에는 인사(HR)가 중요하며, 그렇게 모인 구성원들은 job love를 위해 안팎으로 마케팅에 힘써야 하며, 그런 마케팅이 곧 브랜딩이자 디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첫 째다. 회사가 굴러가기 위해 모인 employee들은 개발자와 디자이너와 그 외로 나뉜다고 생각했으니 그 외 나머지에 해당하는 곳 어디든 일을 배워 실무를 해보고 싶다는 (두루뭉술한) 목표였다.


둘 째로는 간호사들이라면 흔히 입에 달고 사는 말, '간호사라면 어딜 가든 곧 잘 적응한다'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수를 막기 위해 모두가 날을 세우고 있는 곳, 예민함이 무기가 되는 곳, 모든 업무가 과학적인 근거로 짜인 곳,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톱니바퀴들을 관리하기 위해 관리자는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보수적인 색을 취해야 하는 곳. 이런 병원-연구-제약 필드에서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한 간호사들은 어딜 가든 타인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성장한다는 애잔한 프라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새로 채용했을 때, 같은 업계라도 소속을 옮기면 일을 새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에 누가누가 먼저 흡수하냐는 건 IQ로 판단되는 똑똑한 머리가 아니라 센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간호사는 센스가 곧 생명인 직군이다. 여하튼 난 그렇게 간호사에서 '회사원'이 되었고, 출근과 함께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곤 당분간 끝내볼 수 있을 줄 알았던 고민에 새로운 불씨가 피워졌다. "나 정말 잘할 수 있는 것 맞아?"


 전혀 다른 직군에서의 시작이니 모르는 것의 투성이는 당연한 것인 데다 이제 겨우 한 달 될까 말까 하는 시간에선 신동, 천재들이 아니고서야 절대 잘할 수 없다. 나도 안다. 그건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가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답답함을 느껴 지인들에게 고민의 썰을 풀었을 때 돌아오던 위와 같은 위로(야 너 이제 겨우 한 달이야. 못하는 게 당연하지. 주눅 들지 마 류)는 진심으로 고맙지만 가려운 곳을 속 시원히 긁어주지 못했다.


내 앞에 넘어야 할 산들이 있는데 뿌옇게 안개에 가려져 안 보이는 막연함. 내가 성장하기 위해 목표를 어찌 세워야 하는지, 넘어야 할 산이 뭔지,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이 불투명한 상황이 영 어색하고 주눅 들게 했다. 해야 할 일들이 저렇게 to do list에 확실하게 적혀있는데도 왜 막연하게 느껴지는지 연필로 그리는 스케치에 자꾸 어디에 그려야 할지도 모르는 주제에 굵게 검정 아웃라인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시작부터 단추를 이렇게 끼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당장에 이 안경을 안 닦고 쓴 기분을 지울 수 없다면 내가 성장할 포인트가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반드시. 그래서, <수학의 정석>을 샀다.


최상위권에 있지 못했던 이과생에게 수학이란 애증이다. 흔히들 말하는 성공의 열쇠도 수학이고, 발목을 잡는 것도 수학이다. 문과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지만 이과는 과장해서 말하자면 다른 것들이 다 꼴등이어도 수학만 잘하면 어느 정도 먹고 들어간다. 역시 최상위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어설픈 상위권에 위치했던 나 역시 대학에 입학하고 느낀 첫 해방감은 '더 이상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에서 나왔다. 방구석에 쌓아뒀던 수학 문제집을 싹 노끈으로 모아 미련과 함께 묶어 폐지로 버리는 기분을 아시는지. 그런 내가 본능적으로 수학 문제집을 사서 내 해우소로 삼게 되었다. 후기가 어떠냐고? 만족스럽다 못해 쾌감을 얻는다. 웃기지?


가끔 SNS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중독 영상이라고 돌아다니는 것들이 있는데, 공장에서 작업할 때 서로 암수 맞물리는 부분의 아다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 쏙- 하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두 번, 세 번 돌려 본다. 수학 문제를 풀었을 때, 수학 문제집이 내게 전달해준 만족감과 쾌감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확실한 정답이 있다. 문제마다 풀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원리와 개념이 확실하다. 어려워서 정답을 전혀 모르겠다면 해답지를 보면 된다! <수학의 정석>을 펴서 '이를 테면'으로 시작하는 말들을 꼼꼼히 보고 그 개념을 적용해서 문제를 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수학 공부를 하면서 머릿속이 비워지는 모순된 경험을 하게 된다. 출근 전 30분, 혹은 퇴근 후 30분 정도 매일 수학 문제집을 풀면 하루 동안 내게 쌓였던 피로감이 수학 마사지를 받으면서 사라지는 기분이다. 수험생 시절 이렇게 수학 공부하는 게 행복했다면 서울대가 뭐야, MIT도 갔을 거야. 하하.


내가 그동안 했던 일들은 모두 과학적인 근거가 타당하게 뒷받침되어 프로토콜과 매뉴얼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 규칙에 따라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프로토콜을 의심하려면 그에 맞는 또 다른 타당한 근거들이 충분해야 한다. 근거, 근거, 근거, 과학, 과학, 과학. 그리고 정답(正答). 지금 넘어야 할 산이 뭔지 뿌옇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고 막연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어색한 이유도 그래서였나 보다 하고 깨닫는다. 정답이 없고, 가지고 있는 열쇠 중 최선의 선택을 찾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업무 방향인 데다가 그걸 나는 처음 경험하는 중인 것이다.


사람의 타고 난 성향은 바꿀 수 없기에, 난 앞으로도 일하면서 종종 답답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소화제로 <수학의 정석>을 선택했고, 만족한다. 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했더니 전혀 공감할 수 없다고 눈을 똥그랗게 뜨는 사람 90, 내 소화제 포인트를 이해하는 사람 10이다. 반응도 재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계속 답답하다고 끙끙대고 스트레스받는 걸 감당 못해서 흰머리 왕창 나고 위장병이 도지는 결론이 아니라, 나름 건강한(?) 돌파구를 찾았다는 게 또 다행인 게 아닐지. 네, 그렇게 저는 <수학의 정석>을 푸는 새로운 변태 같은 취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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