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선생님이 늘 그렇듯 정장 투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신발까지 맞춰 신은 채 또각또각 비탈진 길을 걸어 교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텅 빈 학교에서 늦은 퇴근이다. 길 건너 근린공원의 벚꽃들이 영화 '4월 이야기'에서 처럼 바람에 날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이 분홍색으로 덮여있는 듯 황홀했다. 그 공기 속을 혼자 걷고 있자니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교문을 나서려는 순간, 어디선가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나 두 손을 꼭 감싸 안으며 아는 체를 한다. 훤칠하고 잘 생겼다.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어 얼굴도 하얗고 귀티가 나 보인다.
"누구지? 제자인가? 여기 졸업생인가? 전에 학교 졸업생인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빠르게 생각이 지나간다. 눈을 최대한 인자하게 뜨고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는 미안함을 미소로 무마시키며 쳐다보고 있었다. 두 손을 꼭 잡힌 채, 환한 눈웃음을 보내며, '니가 누구인지 먼저 말해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청년은 대답대신 지긋이 웃으며 두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묘한 분위기다. 그런데 아주 나쁘지도 않다. 둘이 마주 보며 환하게 웃고만 있었다. 촌각의 순간이었다.
"야, 너 그 손 안 놔. 선생님, 피하세요."
운동장 쪽에서 축구하던 남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H선생님은 상황 파악이 안 된 채, 달려오는 아이들의 속도감에 놀라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손을 뿌리쳤다. 같은 순간 청년도 손을 놓고 꽃비속으로 겅중겅중 달아났다.
"야, 너 거기 못 서. 거기 서."
축구화를 신은 몇몇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지만 신호등을 건너가 버린 그를 잡지는 못했다.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니 아래는 츄리닝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샘, 괜찮으세요. 저 사람 나쁜 사람이에요. 자꾸 여자들 손 잡고 다닌다고 소문이 나있어요. 잡아서 경찰에 넘겨야 하는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된 아이들이 씩씩거리며 아쉬워했다.
20대로 보이는 그 총각은 얼마 전부터 학교 주변에 나타나 여선생님 손을 잡았다 한다. 다른 한 선생님의 경우는 손을 잡고 자신의 볼에 갖다 대기도 했단다. 그 선생님도 제자인 줄 알고 웃으면서 같이 손을 맞잡고 있었고 자신의 손이 청년의 볼에 비벼지는 것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내가 맨날 만나는 '한 스마트한다는' 교사들이 이리도 허술하다. 이야기를 들은 다른 여자 선생님들이 자신들도 그랬을지 모른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참 어리숙들 하다. 머슴애들은 쉽게 손을 잡고 그러지 않는다. 가끔 매우 사교적인 남학생들이 스스럼없이 행동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의 손을 불쑥 잡지는 않는다. 다 큰 청년이 된 제자가 오랜만에 나타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분홍꽃비가 나리는 분위기 때문에 정신줄을 놓았던 것 아닐까 싶다. 난 절대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자신은 없다.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이 다가와 꽃비속에서 손을 잡으면 그냥 잡히고 싶을 것도 같다. '4월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아! 다 봄 때문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