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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 Mar 10. 2024

地擧根開

'地擧根開'

 

첨 듣는 사자성어지요? 사전 찾아보지 마세요. 없을 거예요. 제가 그냥 지어내었으니까요. 뒤에 가서 알려드릴 테니 일단 제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얼마 전 옛날 동료를 몇 명 만났어요. 한 명이 이번에 명퇴를 했다고 해서 만나러 나갔지요. 최근에 근무한 학교가 역사가 오래되어 환경도 불편했지만 무엇보다 건물이 여러 개 동으로 되어 있어 오르내기기가 몹시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퇴행성 관절염으로 치료받던 무릎에 위험 신호가 와서 그만두기로 결정했다고요. 우리는 축하해 주었지요. 언제부터인지 하루라도 빨리 학교를 떠나는 사람은 더 축하를 받아요. 그리고 ’ 부러워요.‘라는 추임새를 반드시 넣어줘요.

 

뭐 할 거냐고 물었더니 우선 3월 말에 딸과 외손주들과 태국 여행을 가기로 했다더라고요.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외손주가 두 명이나 있어요. 큰 손주는 벌써 초등학교에 다니고요.


“체험학습으로 여행 가는군요. 요즘은 그렇게 학기 중에 많이들 가니까.”

전 교사다 보니 일단 학교 결석을 하고 가겠구나 싶어서 이런 반응이 나오더라고요.


“네, 3월이 제일 싸기도 하고.”

고등학교 학생들도 학기 중에 심심찮게 가족여행 간다고 체험학습을 쓰니까 초등학생은 더 부담 없이 가겠구나 싶었지요.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OOOO라고 들어보셨어요?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학기 중에 체험학습도 한번 못하고 개근하는 아이들을 그렇게 부른데요. 나야 좀 싸게 여행 다녀오려고 가는 거지만. “

믿기지 않아 네이버를 뒤져 보았지요. 뉴스에서 그 단어가 언급되었는데 맘카페 엄마들도 같이 분노하고 있더군요.

”맙소사. 이 말은 입으로 소리 내어 사용하면 안 되겠는데요. 사용하지 않아서 사라지게 해야 할 그런 단어네요”

 

문제의 그 단어는 위 제목의 네 글자를 거꾸로 읽으면 됩니다. 읽으셨어요? 어디 가서 절대 사용하시 마시고 누가 사용하면 쓰지 말라고 하실 거지요.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요. 개근이 개그가 되고 성실함이 멸시의 대상이 되었네요. 작년에 진급사정회 때보니 어떤 반은 개근상이 한 명도 없는 반도 있긴 하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죠. 아프면 쉬는 게 맞으니까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저런 말은 왜 만드는 걸까요? 정말 궁금해요. 이제 개근이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나요? 개근 피하기 위해 가족여행을 가야 하는 시대가 된 건가요? 빚내어 학기 중에 해외여행 가야 하나요? 개근상은 부끄러운 상이라 절대 안 받도록 부모님들이 허리를 졸라매야 하나요? 우리 다 x쳤나요?

 

첨에는 문제의 단어를 그냥 쓰자니 눈을 통해 사진으로 각인될까 봐 거꾸로 써 봤어요. 예전에 ’ 이렁지 이렁지‘라는 책이 있었는데 초등학생이 쓴 것이었어요. 자기가 지렁이를 공부해 보니 정말 고맙고 무해한 동물인데 사람들이 징그럽다고 피해서 어떻게 전할까 궁리하다가 이름을 거꾸로 부르기로 한 거래요. 아이도 귀엽고 제목도 귀엽죠. 저는 더 감추고 싶어 거꾸로 쓴 것을 한자로 바꿔봤어요. 그런데 바꾸고 보니 의미심장하네요. 젤 쉬운 글자로 소리 나는 대로 대체했는데 말입니다. 地擧根開, 즉 땅이 들어 올려지고 뿌리가 드러난다. 꺄! 교육의 근간을 흔드는 현상이라는 거잖아요. 글자 속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거였어요. 셜록 오드리가 된 기분입니다. 그나저나 우리 정말 어디로 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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