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작은 운동장이 있다. 여름이 되니 땡볕에 굵은 마사토가 눈이 부신다.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이 화끈화끈하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 운동장은 축구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동아리 축구부 아이들이다. 아래위에 까만색 축구복을 맞춰 입었다. 뉴질랜드 럭비팀 '올 블랙스'를 연상시켰다. 운동할 때 까만색은 강한 느낌을 준다. 에너지가 뻗치는 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이 몰려다니면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날아오는 공도 속도가 무섭다.
동아리 시간이 끝나고 맨발 걷기를 하러 다시 나가 보았다. 이미 다른 반은 마치고 집으로 갔는데 이 아이들은 아직도 공을 차고 있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로 내리쬐는 운동장 한 귀퉁이에 나란히 서서 한 명씩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린다. 그러더니 코너킥을 올려서 연습을 한다. 언제 끝날지 몰라 구석으로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몰려다니지 않아서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경계했다.
나무 그늘 아래로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는데 여전히 연습 중이다. 그날따라 오월의 태양이 예사롭지 않게 따가웠는데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흘리며 공을 차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을 피해 멀리 걷고 있는데 내 앞으로 공이 굴러왔다. 뒤 따라 한 녀석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공을 발로 멈추고 살짝 차 주었다.
"힘들지 않니? 안 더워?"
"아, 힘들죠. 덥고 힘들어요."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끝났으면 그만 들어가지 않고."
"재밌잖아요."
그러더니 공을 멀리 차서 날리더니 뒤 따라서 뛰어갔다. 이마에서 땀이 날리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재미있어서 하고 있구나. 재미있는 것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거구나.
문득 아는 언니가 생각났다. 자그마한 몸집에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고 생김새가 야무지다. 국어 선생을 하다가 몇 년 전에 정년퇴임을 하고 요즘은 시민 정원사를 하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났는데 고동색 두꺼운 천으로 된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커다란 주머니가 여기저기 달려있어 딱 봐도 작업용 앞치마다. 모자도 쓰고 있었는데 모구청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었다. 구청에 고용이 되어 지역에 있는 수목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돈은 많이 버냐고 물으니 용돈 정도 번다고 했다. (이런 질문밖에 못하는 게 내 수준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았단다. 교사를 한다면 생물 교사를 하고 싶었는데 고3 때 담임선생님이 빨리 발령받으려면 국어과를 가라고 했단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렇게 했다. 팔자에도 없는 국어를 전공하고 그 과목을 40년 가까이 가르쳤다. 힘들었단다. 늘 마음에 정원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터라 퇴임을 앞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대학에도 다니고 다양한 연수도 받으며 자격증도 여러개 땄다. 피곤했지만 정말 재미있었고 이제야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단다.
퇴임을 하고 2년간 자원봉사만 하고 다녔다. 서울시와 구청에 시민 정원사로 등록하여 무급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했다. 나무도 다듬고 정원도 관리했다. 학교에 있는 정원도 관리해 주고 다녔다. 조경사, 원예사 자격증도 땄다. 그러다 올해부터는 적지만 돈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단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뙤약볕에서 일해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단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란다.
옆에서 보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닌데 고생을 자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그렇게 벌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러나 자기 정원을 가질 수 없어 동네 정원을 다 돌보기로 했다는 그녀의 말이 그저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사람은 결국은 자기가 재미있는 것을 하게 되는 걸까? ‘재미’의 사전적 의미에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도 있지만 ‘좋은 성과나 보람’도 있는 것을 보면 마음에서 즐겁기도 하고 보람도 있기에 그런 것 같다. 재미에 빠져서 땀을 흘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미소를 짓게 된다.
일요일이면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축구하는 아저씨들을 이제는 한심하게 바라보지 말아야겠다. 유니폼을 챙겨 입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재미가 있는 것이다. 남의 재미를 함부로 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