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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해와 함께' 런던으로 가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모른 채

by 오드리

전날 밤은 독감 증상을 몰아내기 위해 온몸에 땀을 흘리며 잤다. 그렇게 새해 아침은 푹 젖은 잠옷을 빠져나와 인천공항으로 향하며 시작되었다. 온갖 상비약을 챙긴 채. 건강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지만 다 무시했다. 지금 뭘 어쩌겠는가. 일단 가야지. 10시 3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6시 공항버스를 탔다.


짐을 싣고 푹신하고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일단 비행기만 타면 다 괜찮아질 거야.'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매우 근거 있는 자기 확신이다. 그 새벽에 씽씽 달려야만 하는 버스의 속도가 느려지고 가다 서다를 했다. 눈을 떠보니 버스 앞쪽 도로에 빨간 불이 가득하다. 이 새벽에 무슨 차들이 이렇게 많지. 해외 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나. 심한 정체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 올림픽대로도 빠져나가지 못한 지점이었다.


도착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이 공항으로 간다면 출국수속도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다들 새해 첫날부터 어딜 가는 거지. 연휴도 아닌데 이게 가능한가. 그 순간 핸드폰의 안전문자 경고음이 버스 안에 동시에 울렸다. 6시 39분 계양구에서 보낸 문자다. '금일 새해 계양산 해맞이 등산객으로 매우 혼잡하오니...' 아, 이 사람들이 다 해맞이하러 가는 거였구나.


참 부지런도 하다. 맨날 떠오르는 해인데 뭔 유난들을 떠나,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돌아보면 나도 만만찮게 유난을 떨었었는데. 새벽에 동해까지 차를 몰고 가기도 하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달달 떨고 서있기도 하고, 밤새 일기장에 희망찬 메시지를 가득 채우기도 했었다. 작년에도 블로그에 새해맞이 각오를 올리기도 했다. 그건 '중꺽그마'였다.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뭐 이런 거였다. 올해는 짐 싸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하튼 2025년은 각오고 뭐고 그럴 여유도 없이, 길고도 긴 인천대교를 가득 메우고 서 있는 '극성스러운' 해맞이 인파 덕분에 새해를 실감하게 되었다. 공항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구름이 가득하다. 저런, 멋진 해맞이는 힘들겠는 걸. 7시 30분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구름이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새해의 첫 해는 이미 떠올랐다.


늘어선 키오스크 앞에 꼬불꼬불 서 있는 줄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몇 명의 안내하는 분들만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도와주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키오스크 AI는 신속하지는 않았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메시지만 띄운 채 가만히 있었다. 1시간은 족히 걸려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새벽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을 새해 첫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새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괜히 반갑게 쳐다보다가 뜬금없이 윙크를 날리며 이번 여행 잘하고 돌아오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런던까지 가는 비행기는 단거리의 시베리아 영공을 피해 러시아 남쪽 국경선 바로 아래를 날아가고 있었다. 흑해를 지나 유럽의 여러 나라를 통과해 런던으로 향했다. 무려 14시간이 걸렸다. 일부러 중간자리 복도 쪽에 자리를 잡고 시간마다 일어나 스트레치를 했다. 스쿼트는 500개 넘게 한 것 같다. 친절한 승무원이 나중에는 먼저 인사를 했다. 밖이 보고 싶어 창문 덮개를 살짝 올렸더니 햇빛이 너무 강해 열지도 못한 채 바로 내리고 말았다. 비행기가 해와 함께 서쪽으로 가고 있어서 그렇다.


아침에 챙기지도 못했던 2025년 새해 첫 해가 런던까지 따라오며 상서로운 행운으로 샤워를 시켜주는 것 같아 기분이 들떴다. 딸이 런던에 직장을 구하면서 (그 시점에서는 그랬으나 다음날 취준생으로 돌아옴) 방도 구해야 하고 이사도 해야 했다.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 부담감을 가지고 건강도 좋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눈부신 해가 따뜻하게 비행기를 호위한다 생각하니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른 채 억지를 써서라도 행운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내친김에 올해 나의 목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럭키비키'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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