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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B&B에서 살아남기

St. George Lodge in New Malden의 기억

by 오드리

새해 첫날,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서 만났던 해는 오후 4시 30분경 히드로 공항에서 작별을 했다. 마중 나온 딸을 만나 밖으로 나오니 바닥은 축축했고, 어둠은 더 짙은 농도로 다가왔다. 종일 내린 비가 건물과 도로에 차분히 스며들어 회색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습기찬 공기는 눅눅했다.


지하철로 터미널 2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온갖 먹거리로 가득 채운 24인치 캐리어는 끌고 다니기에 가뿐했다. 미리 예약한 B&B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바로 탔다. 구글맵은 전 세계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다. 1시간 정도 걸려 뉴몰던 파운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빨간 2층 버스에서 내리니 스산한 냉기가 어깨와 등으로 스며들었다.


1층에 한식당이 있어 한국인이 운영하나 싶었는데 열쇠를 들고 나타난 주인장은 스리랑카인이었다. 아침으로 한식을 기대했던 예상이 빗나갔다. 한 달 가까이 밥과 김치구경을 못해 심신의 기능이 고장 났다는 딸과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먹었다. 서울로 치자면 어복쟁반과 맞먹는 가격이었지만 몸이 느끼는 행복감은 그 이상이었다. 뼛속까지 따뜻한 기운이 들어가 영국의 차가운 습기를 몰아내었다. 이 정도면 전투에 임해도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갈 정도로 좁은 계단을 올라 레고로 만든 집에 들어온 것 같은 2층 구석방으로 안내되었다. 문에 난 구멍에 열쇠를 끼우고 한참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린 뒤 문이 열렸다. 싱글 침대가 2개, 옷장 하나, 노트북만 한 TV와 작은 테이블에 의자 하나가 작은 공간에 꽉 차있었다.


목욕탕 문을 여니 시골 간이 화장실에나 있었을 법한 작은 세면대와 덩치가 있는 사람은 몸을 돌리기 쉽지 않아 보이는 샤워부스가 전부였다. 세면대는 찬물과 더운물 수도꼭지가 따로 있어서 손을 오므려 찬 물을 반 받고 얼른 더운물 쪽으로 옮겨 손을 씻었다. 세수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면 이마가 벽에 부딪혀서 물이 세면대 밖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허리를 숙였을 때 엉덩이가 문을 밀어내진 않았다.(전에 그런 곳에 묵은 적도 있었다.) 그저 약간의 요령과 행운이 필요했다.



길가로 나있는 창에는 얇은 커튼이 하늘거리고 있고 아래에는 창문의 반의 반쪽 정도 되는 라디에이터가 침대 사이에 끼여 있었다. 방의 공기를 데우기 위해 한껏 열을 내고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서울 집에서는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포슬포슬한 히트텍 내복 위에 오리털 내피를 입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딸이 그 위에 내 코트와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었다. 세상의 종말을 피해 지하 벙커에 들어왔나 싶었다.


아침 식사는 7시부터였다. 식당은 양쪽 벽으로 붙은 좁은 선반에 의자가 6개 정도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곳에 요리사가 있었다. 어물하게 영어를 더듬거리는 인도계 남자로 선한 웃음을 지으며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라며 짧게 묻는다. 접시에 계란 프라이 두 개, 두툼한 베이컨 몇 조각 그리고 통조림용 붉은 콩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접시에 내어주었다. 한 사발은 될 법한 밀크티와 함께. 5일 동안 그곳에서 식사하는 사람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우리가 일찍 나와서 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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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B&B에 매니저도 있었다. 압둘이라 불리는 순박한 웃음의 말이 많은 남자였다. 완벽하지 않은 영어였으나 요리사보다는 훨씬 잘했다. 모든 대화를 농담으로 끝내는 특이한 재주가 있어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딸에게 엄마를 잘 보살펴야 한다고 몇 번을 다짐시키는 것을 보고, 퍽 마음에 들었다. 비 오는 날에는 살이 하나 부러진 까만색 우산도 빌려주었다. 물론 돌려주진 못했다. (그 사연은 다음 편에)


우리가 묵은 곳은 하룻밤에 10만 원이 넘는 곳이지만 런던근교에서 꽤 저렴하게 구한 곳이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엘리베이터가 있고, 넓은 욕실에, 제대로 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가 나오는 호텔에 묵는 사람도 있겠지만 (좀 부럽네), 이곳은 식당도 다섯 발자국이면 갈 수 있고, 한식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이 해주는 아침이고, 날씬해서 목욕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그리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지 않고 단잠을 잘 수 있었으니 런던에서 일단 럭키비키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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