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플 때 장 보지 않기, 외로울 때 연애하지 않기. 그리고
┃스스로 파 놓은 함정┃
일이 벌어진 후 뒤돌아 보면 여러 조건들이 일어난 절묘한 타이밍에 소름이 돋곤 한다. 배고플 때 장 보면 쓸데없이 과소비를 하게 되고, 외로울 때 연애를 하면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쓰이게 된다. 성급한 마음에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말이다. 그 조건들이 서로 끌어당기고 있나 싶다. 알면서도 끌려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게 함정에 빠졌다.
요크에서 공부한 딸이 런던 직장에 취직이 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예상보다 빨리 취직이 되어 급히 방을 구해 이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방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직장과 가까워야 하고(교통비가 살인적이다) 예산에도 맞아야 했다. 앱을 통해 몇 군데 예약을 했으나 답이 온 곳은 한 곳뿐이었다. 방을 구하자면 최소 다섯 군데는 비교해봐야 하는데, 문제의 싹이 여기서 트기 시작한 거다.
주로 셰어 하우스로 주인이 같이 살면서 남은 방을 렌트하거나, 세입자들만 방을 하나씩 렌트하여 살곤 한다. 런던은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 집주인이 면접하듯 세입자를 고른다는 소문이 있어 '그 방'을 꼭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마저 들었다. 문제가 부풀기 시작했다.
┃사람 좋은(?) 집주인┃
반드시 계약을 해야 한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그 집에 들어갔다. 집주인은 나와 동갑이었고 사람 좋은 미소로 차를 내어 왔다. 우리도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마주 앉았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콜롬비아에서 방송국을 하던 아버지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영국으로 유학 와서 사업을 시작했고 현재는 딸 둘과 살고 있다. 얼마 전 큰 수술을 해서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TMI 그 차체였다.
방은 너무 작았다. 싱글 침대, 행거, 5단 서랍장, 노트북만 한 테이블이 꽉 들어차 움직일 공간도 없었다. 딸은 매일 출근하면 잠만 자면 된다고 했다.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집주인이 계약서를 들고 왔다. 집세를 못 내면 이자를 받는다는 조항을 "이게 비즈니스도 아닌데 지우자"며 사람 좋게 웃는다. 마음이 놓인다. 엄마 같은 마음이 느껴져 이곳에 살아도 될 것 같았다. 금방 친해져서 마치 자매 간의 라포가 형성된 것 같았다. (나도 같이 함정에 빠졌다.) 무엇에 홀린 듯 계약을 했고, 얼렁뚱땅 '방'을 구했다.
┃일이 꼬이기 시작┃
방 계약을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오후에 딸이 OT를 받으러 직장에 들어갔다 나오면서였다.
"엄마, 나 이 직장에 못 다닐 것 같아. 인터뷰할 때와 달라. 너무 재미없어."
일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못 다니겠다고 한다. 당황스러웠다. 요즘 런던에서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말로만 듣던 'MZ'세대가 바로 옆에 있었다.
"여기 안 다니면 아까 그 집에서 하루 종일 잡서치(job search) 해야 하는데 너무 좁아. 책상도 없고 계속 있으면 숨 막힐 것 같아. 그리고 그 아줌마 너무 말이 많아."
그제사 딸은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고, 나는 나가려는 정신을 부여잡아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OT를 받고 나서 방계약을 했어야 했다. 그렇게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내 마음 같지 않다┃
사람들 마음이 같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내 마음 같을 것이라 착각했다. 돌아보면 말도 안 되는데 그때는 당연히 내 마음 같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집주인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말하고 계약을 무르겠다고 했다. 내가 그녀였다면 난 당연히 이해하고 디포짓(한 달 월세의 반)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사람 좋은 미소와 두 시간 가까이 우리 사이에 오갔던 다정한 대화를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을만했다.
결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말을 듣지도 않고 자신이 이미 광고도 내렸고 오후에 오기로 한 사람도 받지 않았다며(이건 믿을 수 없다) 자신이 입은 손해에 대한 페널티를 생각해 보겠다고 억지를 썼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다음날, 디포짓은 고사하고 한 달치 월세를 내라고 메일이 왔다.
┃도와주는 사람들┃
계약은 계약이고 약속은 엄중하다. 맞다. 한국이었으면 계약금조의 디포짓은 날리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그건 날린다 해도 한 달 치 월세를 내라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영국의 법을 모르니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다. 신중치 못한 행동으로 금전적인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생각보다 법원에 불려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나보다 더 당황한 딸은 영국인 친구들에게 전화와 메일을 보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도 이런 경험이 없으니 citizen advisor (작은 자치구마다 있는 법률지원 상담사) 번호를 알려주고 문의해 보라고 했다. 통화연결이 쉽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상담을 해주었다.
이런 경우 통상적인 규범은 없고 쌍방이 체결한 계약서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일반적인 내용만 적힌 한 장 짜리 계약서에 따르면 디포짓은 어떤 상황이든 계약이 끝나면 돌려주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 돈 받자고 소송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상대도 마찬가지 입장일 거다. 한 달 월세 청구에 대한 계약서상의 근거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답이 없다.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스스로 함정을 판 대가를 지불해야지 어쩌겠는가.
┃일은 되는 쪽으로 흘러간다┃
연락을 주지 않던 다른 집주인들이 그제야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에 사는 한국인 커뮤니티, '영국사랑'에도 몇 개의 방이 새롭게 올라왔다. 기다렸다는 듯, 참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런던에 방이 필요해서 3군데 약속을 정했다. 김포, 일산, 부천 정도의 거리에 있는 것을 보러 다녔고 한 곳과 계약을 했다. 젊은 부부가 한 명의 아기와 살고 있는 주택가의 작은 이층 집이었다. 방도 적당히 넓고 월세도 좀 더 저렴하여 몇 달 살면 손해 본 디포짓을 만회할 수도 있어 좋은 조건이었다.
예전에, 집은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이 딸이 머물 집이었나 보다. 맞지 않은 곳은 가지 못하게 누군가 방해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다. 영국도 경기가 좋지 않아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멈춰있는 시간에도 많은 배움이 있고, 그 순간이 어떤 모습으로 채워질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딸은 길을 잘 찾아갈 것이다. 가다 보면 길이 또 다른 길을 만드니까. 지나고 보면 언제나 일은 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래도 럭키비키┃
영국정부는 작년 여름에 전기, 수도, 가스비를 평균 18% 정도 인상했고, 덩달아 교통비와 집세가 같이 상승했다고 한다. 내가 본 영국인들은 집안에서 라디에이터에서 나오는 열기에 의지한 채 스웨터를 걸치고 털 신발을 신고 지낸다. 러우전쟁의 영향도 있지만 유럽의 나라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정책적으로 중단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아끼며 인내하며 살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기후위기등을 생각하면 당연한 모습 같기도 했다. 우리가 너무 '포시럽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딸과 약속했다.
지나간 일 자책하지 않기.
앞으로 같은 실수하지 않기.
꼭 필요한 것만 소비하며 아껴서 살기.
다른 곳은 디포짓이 대개 한 달 월세인데 이곳은 그나마 반만 내었으니 어쨌거나 럭키비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