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디폴트 값에 대하여
스톤헨지, 코츠월드, 옥스퍼드를 런던에서 하루 만에 다녀 온 데이 투어에 관한 글입니다. 사진과 함께 올립니다.
아무리 바깥에 샬랄랄라 벚꽃이 날려도 내 마음에 구름이 끼어 있으면 연분홍도 회색이 되어 버리지요. 반면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내 기분이 날아갈 듯하면 빗속도 의연히 걸을 수 있구요. 바깥세상이 아니라 내 마음속이 중요한 거겠지요. 다들 자기 마음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 전날 런던에서 방 계약을 뒤엎은 후 상황이 여유가 없었지만, 한국에서부터 예약해 둔 데이 투어는 취소할 수 없었어요. 이번에는 꼭 스톤헨지를 가보겠다고 결심한 바도 있었고, 사실 취소를 해도 다른 방 뷰잉이 다음 날이라 딱히 할 일도 없었어요. 그저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 뿐이었지요.
취소한 집주인이 요구한 한 달치 월세에 대해 알아보느라 딸은 9인승 밴 맨뒤에 앉아서 연신 통화 하고 문자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새벽같이 일어나 vauxhall역에서 다른 일행을 만나 스톤헨지로 가는 길이었는데 말입니다. 영국의 겨울 답지 않게 구름 한 점 없는 완벽한 날이었어요. 넓은 들판에 밤새 내린 서리가 쏟아 놓은 보석처럼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어요. 한마디로 영롱했어요. 아무리 심란해도 자연이 주는 위안은 압도적이었어요.
스톤헨지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허허벌판에 있어 방문하기는 쉽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운전해서 가거나 데이투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지요. 현지 투어는 터무니없이 비쌌던 기억이 있답니다. 제가 선택한 투어는 네이버에서 우연히 발견했어요. 한국 여행사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고용해서 운영하는 상품이구요. 코츠월드와 옥스퍼드까지 포함입니다. 가격도 인당 10만 원대 초반으로 합리적이었고, 얼리버드로 예약하면 좀 더 할인해주더군요. 점심으로 김치볶음밥을 주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버터로 볶은 것 같았어요. 역시 든든한 포만감이 행복의 디폴트값인가 봅니다.
주차장에 내려서 스톤헨지까지 셔틀버스도 있지만 우리 일행은 모두 걸었어요. 25분 정도 걸리더군요. 길 양쪽으로 넓은 풀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한참을 가니 멀리 돌덩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9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들이 무슨 이유로 허허벌판에 원을 그리며 놓여있는지 추측만 무성하지요. 외계와 소통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고, 천문학을 연구하던 곳이라고도 하는데 최근에는 여러 부족이 단합을 위해 각기 다른 곳에서 돌을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더라구요. 외계인과 소통하던 곳이었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은 있습니다. 뭔가 낭만적이잖아요.
전화통화만 하던 딸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더군요. 영국에서 자주 만날 수 없는 햇살만으로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어요. 근대 진짜, 누가 왜 저 거대한 돌들을 그곳에 갖다 놓았을까요?
코츠월드는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 같은 곳입니다. 600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인데 부유한 영국인들의 은퇴 후 거주지로 유명하다네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불리는 바이버리(Bibury)와 개울물의 경치가 아름다운 버튼온더워터(Bouton-on-the-water)에 들렀는데 한 겨울인데도 관광객들이 많았어요. 북적이는 사람들로 전원의 여유로움은 찾을 수 없었지만 회색돌로 지은 집들과 아름드리나무와 시냇물이 어우러진 마을은 참 이뻤습니다.
버튼온더워터에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작은 카페에 들어갔어요. 바깥에 테이블이 있었는데 추워서 그런지 장작불을 피워두었더군요. 나무 타는 연기와 향이 주변에 자욱한데, 긴 꼬챙이를 들고 아이들이 주변에 매달려서 마시멜로를 굽고 있었지요. 핫쵸코를 한 잔씩 마시며 딸과 함께 그 풍경을 구경했어요. 딸은 하루종일 문의한 내용과 내일 뷰잉 일정을 알려주었어요. 바깥은 평화로운데 마음은 해결해야 될 일로 가득 차서 풍경을 만끽할 공간은 부족했네요.
영국의 1월은 해가 짧아 4시쯤부터 석양이 물들기 시작하더군요. 옥스퍼드에는 4시 반경에 도착하여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밤거리를 가이드를 따라다녔어요. 이 투어는 여름에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서관 앞 카페에서 초승달을 올려다 보며 파니니를 하나씩 먹고 아침에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어요. 긴 하루였어요.
아름다운 풍경은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힐링도 시켜주지만, 여행을 만끽하려면 역시 마음에 넓은 공간을 비워두는 것은 필수인 듯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고프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스톤헨지는 '집'후경이었네요.